살고 볼 일이지 무슨 자존심이냐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살아있는 오늘에 최선을 다하자!
“열등감은 사고의 원인이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일들에 대해 목사님이 진단하신 말씀이다. 열등감이 무엇인가? 결국 자존심의 상처로부터 빚어진 패배적인 감정 아닌가. 외부로 폭발하면 남을 죽이고, 내부로 폭발하면 자신을 죽인다.
목사님은 성경의 인물들을 예로 드시며 자존심에 얽매이지 말고 사는 길을 택해야 한다고 호소하듯 말씀하셨다.
“성경에 두 사람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 베드로는 스승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다가 첫닭 우는 소리에 깨닫고 회심한 후, 부활하신 예수 앞으로 달려 나가 사랑의 고백을 하고 수제자가 되었지만, 가룟 유다는 스승 예수를 은 삼십 냥에 팔았다가 자신의 잘못은 깨달았지만 자괴감을 못 이긴 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자살한 겁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정치인, 사업가 등 사회지도층 인사라는 분들이 자살하는 사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나라는 여전히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자살은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달린 일이건만, 타인의 생명을 끊는 일이나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일이나 다 살인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계시록 21장에 살인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자살이 더욱 심각한 것은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살인자는 살아있기에 회개할 기회라도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살행위는 더 이상 아무런 기회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살은 절대 안 됩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할까요? ‘죽을 마음으로 살지’라고 쉽게 말들 하지만, 사실 죽음을 택하는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견딜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를 받고 자괴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의 심정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야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자존심이 짓밟히는 수모를 이야기할 때, 예수님이 당한 수모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수많은 이적과 표적을 통해 구름떼 같은 무리가 따라다녔습니다. 호산나 찬송 가운데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로마군병에게 잡혀가 주먹질을 당하고 수염이 뽑히며 조롱을 당할 뿐 아니라 무서운 채찍질에 흉악범이나 지는 십자가를 지셔야했습니다. 보통 사람이 그 지경이 되면 살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예수님은 자존심을 버리고 오로지 인류구원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모든 수욕을 참고 견디셨습니다. 그랬더니 온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고,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땠습니까? 귀신 들려 미친 딸을 고쳐야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수욕을 견뎠습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아간 예수님께 개 취급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에 그깟 내 자존심쯤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습니다. 개 취급을 하든지 말든지 내 딸만 고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높이 사시고 딸을 고쳐주셨지요. 미친 딸을 고침 받은 그 여인에게 순간 당한 수모쯤이야 대수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왕은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보다 백성과 장로들 앞에서 자기 위신 세우는 일에만 급급하더니 하나님께 버림받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지요.
분명히 말하지만, 자존심이 뭐 말라죽은 겁니까? 자존심 지키려다 다 잃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입니까? 일단 살고 볼 일 아닙니까? 내가 살아야 기회라도 있는 겁니다. 우리의 육체는 기회입니다. 살아있어야 회개할 기회도 있고, 살아있어야 구원받을 기회도 있는 겁니다. 살아있어야 상급 쌓을 기회도 있는 거고요. 그래서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살아있는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겁니다. 내일은 능력 밖입니다. 제발 부탁하건대 지금이라도 이 메시지를 듣고 생각을 돌이켜 살아봅시다. 다시 시작해봅시다!”
“~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