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게더(Together)
수백그루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한 그루의 나무란다. 그것은 하와이 마우이섬 라하이나에 있는 반얀 나무(Banyan Tree)인데, 이 나무는 수많은 가지를 땅으로 뻗치고 뿌리를 내려 나무가 쓰러지지 않게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을 만드는 특성이 있고, 번식력이 강해서 한 그루가 산을 덮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반얀 나무가 죽으면 그 나무가 덮고 있던 땅은 메마르고 황폐한 불모지가 된다고 한다. 빽빽하고 거대한 반얀 나무 밑에서는 모든 영양분이 차단되어 어떤 식물도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번식력이 강한 또 하나의 나무가 있다. 바나나 나무이다. 생후 6개월이면 새순을 내고, 1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는다. 줄기를 따서 옆에 심으면 짧은 시간 안에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서 바나나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하지만 바나나 나무는 반얀 나무와는 다르게 땅에 떨어진 나무의 잎사귀가 거름이 되어 주위의 식물들에게 영양을 공급함으로 다른 식물들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반얀 나무와 바나나 나무는 둘 다 번식력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주위에 끼치는 영향력은 정반대인 것이다.
반얀 나무의 번식력은 다른 식물들의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차단하고, 혼자만 성장하고 혼자만 살아남는다. 하지만 바나나 나무의 번식력은 스스로 거름이 되어서 주위에 영양분을 제공하고, 함께(Together) 생존하고 함께(Together) 성장하며 함께(Together) 아름다운 숲을 이루어 간다.
우리 신앙생활은 ‘홀로’(alone)가 아니라 ‘함께’(Together)이다. 믿음의 지체들이 ‘함께’ 기도할 때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며, ‘투게더’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신다. ‘투게더’ 말씀을 배울 때 함께 성장하고, ‘투게더’ 봉사할 때 더 많은 열매를 맺으며, ‘투게더’ 전도할 때 두려움을 물리치고 담대해질 것이다. 믿음의 지체들이 ‘함께’할 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 지체의식, 형제의식을 가지게 되고 아름다운 믿음의 숲을 이룰 것이다.
우리 모두는 완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모순투성이다. 결점도 많다. 그러기에 더욱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해야 한다. ‘함께’ 자라는 바나나 나무처럼.
이정금 전도사
말, 잘합시다
한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으러 여행을 하는 중에 식사 때가 되어 자주 다녔던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 주인은 사진작가를 알아보고는 그간 찍은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잖아도 사진작가는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었던 터라 작업한 사진들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다 본 후에 식당 주인이 하는 말, “카메라가 좋아서 그런지 사진이 참 잘 찍혔네요.” 사진작가는 기분이 엄청 나빴지만 꾹 참았고 밥을 다 먹은 후에 계산을 하면서 강펀치를 날렸습니다. “냄비가 좋아서 그런지 찌개가 참 맛있네요.”
우리 어머니들이 떡을 만들 때면 체에다 쌀가루를 몇 번이고 거른다. 덩어리를 없애서 떡을 맛있게 만들기 위해서다. 말도 체에 걸러야 한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을 게 아니라 한 번 거르고 두 번 생각해서 해야 실수하지 않고 말의 맛이 난다. 말은 절대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아니다. 성경도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0:19)고 하셨다.
세상 모든 것에는 등급이 매겨진다. 소고기를 사도 등급이 있고, 옷을 사도 등급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당연히 말(言)에도 등급이 있다. 그런데 말이 곧 그 사람 아닌가. 그러니 말에 따라 사람의 등급이 매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열린 수도꼭지처럼 아무 말이나 내뱉는 사람의 등급은 어찌 책정될까.
내 가치는 내가 만드는 법, 말에 품격을 갖추자. 은쟁반에 올려진 금사과 같이 경우에 합당한 말, 절제된 말, 남을 살리는 말, 긍정과 희망의 말로 내 가치를 올리자.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벧전3:10~11).
New Normal of Faith
2020년 새해. 다양한 계획과 함께 시작했지만,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실천은커녕 기존의 생활방식과 전혀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다. 생각지 못한 일상의 변화로 많은 전문가는 포스트(POST) 코로나 시대에 다가올 상황, 시기, 분위기 등 수많은 예측을 꺼내놓고 있다. 대체로 하는 말은 예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코로나의 뉴 노멀(New Normal) 시대라고 부른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기준들이 생길 것이고,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뉴 노멀(New Normal)이라는 말은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회 전체가 영향을 받으면서 이로 인한 사회변화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코로나는 사회 전체와 그 안에 속해 있는 우리에게 뉴 노멀, 즉 새로운 기준을 급속하게 적용하고 있다. 문득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뉴 노멀을 갖는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가 우리 일상에 새로운 표준들을 가져왔듯 우리 역시 신앙을 갖고 믿음의 결단을 하고 난 후 그 믿음을 가지고 자기 삶의 구석구석을 바라보면서 그 믿음에 맞는 뉴 노멀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믿음의 뉴 노멀(New Normal of Faith)’은 무엇일까?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이전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학문적인 배경, 인맥, 그리고 그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이 말은 세상의 관점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허물어뜨려야 새것이 된다는 얘기이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우리의 습관과 우리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무능력하게 만들고 쓸모없게 만들었는지를 말이다. 세상의 관점을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신앙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믿음의 뉴 노멀’이 아닐까 한다.
「당당한 결별」의 저자는 “우리 모두가 똑똑한 인공지능 비서를 하나씩 두고 뭐든 물어보면 답을 찾아준다. 이런 세상에서 답을 아는 자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자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누구나 박사 수십 명을 곁에 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공부 열심히 하고 정답 잘 찾는 모범생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조언하고 있다. 어쩌면 믿음의 뉴 노멀(New Normal of Faith) 역시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믿음의 새 표준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왜 이 일을 하게 하셨고, 왜 이 사람을 만나게 하셨는지, 왜 나를 여기에 있게 하셨는가?’ 하고 우리 삶에 ‘Why(왜)’라는 물음을 던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매일 새로워질 수 있지만, 이 물음이 끝나면 다시는 우리에게 새로움이 없고 오히려 무능력해질 것이다. 삶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것이 될 테니까.
새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환경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지든, 어떤 일을 하게 되든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를 새롭게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기준으로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왜 부르셨는지, 왜 경험하게 하시는지, 왜, 왜, 왜?’ 하고. 그 물음 앞에 우리가 새로워질 때 이 땅에서 쓰임 받기 합당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과거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때 능력 있음을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생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의 주변을 살피는 것. 그것이 믿음의 뉴 노멀(New Normal of Faith)이 아닐까 한다.
뉴 노멀(New Normal)시대에 우리는 믿음 안에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오직 주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에 매여 하루하루 영과 육이 기뻐 노래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Dr. 권정미
jmgood77@gmail.com
고독의 장점
어릴 적 우리 집은 바다 건너 큰 마을과 외떨어져 있었다. 바다를 끼고 돌아 산을 넘는 등교 거리는 1시간 이상 걸렸다. 늘 혼자 등하교를 했던 내 손엔 항상 책이 들려있었고, 걸으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거침없이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시야도 넓어져 갔다. 때로는 머리에 책을 얹고 신데렐라처럼 예쁜 걸음을 걷기도 하며 독서습관의 틀을 다져갔다.
밤이 되면 마당 어귀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에 매어놓은 나룻배에 누워 정적에 몸을 맡기고 북두칠성을 찾아보기도 하고, 보낸 엽서와 신청곡이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청취하며 꿈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늘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고, 성인이 되어서도 일부러 고독의 시간을 찾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유약한 사람은 자신의 나약함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어떻게든 무리를 짓거나 친구가 많음을 자랑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을 혼용한다. 그러나 분명히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고독이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외로움은 쓸쓸한 마음을 의미한다. 즉 혼자 있어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외로운 것이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줄 알면 사고를 한층 더 깊게 할 수 있고, 정신적인 풍요로움은 물론 창조의 원천을 찾기도 한다.
이제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자. 고독은 때론 달콤하다. 대중에 끼어 무의미한 소리를 내는 것보다 나만의 시간 속에서 창조되는 것이 많다.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 알림이 울릴 때마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우리에게서 떠나 나만의 시간을 허락하자. 성공한 모든 자들이 바쁜 와중에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노력한 것처럼, 우리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스마트폰 대신 독서를, 그리고 기도로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고독이란 쓸데없는 생각과 의미 없는 대화로부터 나를 지키는 성찰의 귀한 시간이니까.
추성숙 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