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은 물 위를 걷는 것이다
쏟아지는 비를 멈추며 천국복음을 선포한 멕시코 팔렌케집회 광경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편안하기 위함이 아니다. 육신적인 안일함과 안락함을 구한다면 난센스다. 그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독약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시작했다 육체로 마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첫사랑으로 뜨거웠던 시절에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먼저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고, 물불을 안 가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던 자들이 점차 편안하고 안일한 생활에 물들다보니 불같던 첫사랑은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리고 지극히 작은 일에도 두려워 떨며 사람의 도움을 구하러 찾아다닌다.
성경에 역대하 14~16장에 등장하는 아사왕의 이야기가 아주 극명한 예가 될 것이다. 아사왕은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겼던지 제위에 오르자 유다왕국의 모든 우상을 타파하고 심지어는 이방신을 섬기는 어머니를 그 태후의 위에서 폐하기까지 서슴지 않았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뿐이랴! 구스의 백만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여 백만 대군을 궤멸시키는 승전보를 날렸다. 그러던 아사왕도 20여 년의 태평성대를 지나며 안일함에 젖었던지 제위 36년째에 이스라엘왕 바아사가 쳐들어오자 구스 백만 대군 앞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강하고 담대했던 그가 두려워 떨며 아람왕에게 금은을 보내어 원군을 요청한다. 그뿐이 아니다. 그의 신앙의 변질을 지적하는 선견자 하나니에게 크게 노하여 그를 투옥시키고 백성들을 학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제위 39년에 병들자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병 낫기를 구하다가 죽음에 이른다. 말 그대로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친 전형적인 예이다. 오랜 안일과 안락함이 그를 타락시킨 것이다.
나태와 안일함은 신앙을 변질시킨다. 신앙의 독이다. 편안과 평안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구하는 평안은 여전히 수많은 문제 속에 둘러싸여있으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영적 평화다. 다윗의 고백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곧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요,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편안한 신앙생활이란 없다.
목사님은 자주 말씀하신다.
“신앙생활은 물 위를 걷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견뎌낼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올림픽공원 시절, 목사님은 가든 처치(Garden Church)의 황홀함에 취하는 시간보다는 예배처소의 불안정함 때문에 기도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더욱 많았다. 체육관을 예배처소로 사용하며 목회한다는 것 자체가 물위를 걷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비록 예배처소가 없어 한 겨울에 트럭 위에서 설교하는 일도 있었지만, 해외집회에 나가 살인적인 무더위와 싸우고,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집회를 진행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좌절을 맛보게 하신 적이 없다. 그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기도하고 나아가는 목사님의 믿음을 통해 한량없는 은혜를 쏟아 부어주셨다. 그러기에 목사님은 지금도 당당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각색 질병을 고치며 하나님을 자랑하고 또 자랑하고 계신 것이다. 이처럼 35년 목회 동안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외길을 걸어가시는 목사님이기에, 오늘날 사랑하는 성도들이 질병으로 고통당하면서도 악한 마귀에게 속아 스스로 합리화하며 다시 종의 멍에를 지려는 신앙의 변질에 성령으로 탄식하시는 것이다. 답이 뻔히 보이는데도 기다리지 못하고 포기해버리는 모습에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다.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자. ‘진리는 극히 단순하고,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것’이라고 목사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던가. 문제는 아는데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오래 참고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포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부디 내 아버지 되신 전능의 하나님께서 천국에 이르기까지 나를 인도하시고 안위하신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완전한 평안가운데 거하시길 축복하고 축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