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리는 영을 받았다(히2:14~16)
목회 초기에 한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시들시들한 채소 위에 손을 내미니 채소들이 살아나 싱싱해졌고, 제가 사람들의 머리를 향하여 용접봉을 대니 축 처져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춤을 추는 꿈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그 꿈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국과 전 세계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성령세례를 주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니 죽었던 그들의 영·혼·육이 푸릇푸릇 살아남을 보고 하나님이 오래전에 제게 주셨던 꿈을 이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저를 만나는 자들이 살아나는 것을 봤습니다. 상처받고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 만나고 나면 새 힘을 얻고 소망과 의욕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제가 세상 말로 말빨이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게 아닙니다. 저는 살리는 영, 곧 예수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영은 살리는 영입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전15:45~46).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모든 자들의 영·혼·육이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는 살리는 영인 예수의 영을 받은 자입니다. 살리는 영인 예수의 영, 곧 성령을 받았으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남을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만나면 심신이 지쳐 죽어가던 자가 살아나야 합니다. 좌절했던 자가 용기를 갖고, 의기소침한 자의 기가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마12:20).
반대로 마귀는 죽이는 영입니다(히2:14).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 중에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말로 죽이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잘 가는 사람을 주저앉히고, 풍선을 바늘로 찔러 터트리는 것처럼 희망에 들뜬 사람을 좌절시키는 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혼한 주제에 뭘 해?”, “그 자본금으로 뭘 해보겠다는 거야? 요즘 웬만한 것 가지고는 안 돼.”, “그 나이에는 늦었어.” 이러면서 살아보겠다는 사람을 죽이는 자들 말입니다. 그들이 과연 하나님의 자녀가 맞을까요? 성령을 받은 자들이 맞을까요? 예수는 살리는 영인데요.
나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남을 살리는 자인지, 남을 죽이는 자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하는 말이 어떤지를 살피면 됩니다. 내가 하는 말이 상대에게 위로와 사랑과 용기와 기쁨을 주는지, 아니면 좌절과 고통과 낙심을 주는지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 살리는 영을 받은 자는 말이 다릅니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지요? 맞습니다. “쟤는 공부는 잘해.” 이렇게 말하는 것과 “쟤는 공부도 잘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한 글자 차이입니다만 내용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전자는 절대 칭찬이 아닙니다. ‘공부는 잘하는데 인물이 없다’라든지, ‘공부는 잘하는데 성격이 더럽다’라든지 뭔가 꼬이고 죽이는 말투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살리는 말이요, 온전한 칭찬이 아닙니까?
말을 잘해야 합니다. 같은 말을 해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남을 살리는 말을 하면 내가 살지만, 남을 죽이는 말을 하면 내가 죽습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열두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땅을 탐지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장면입니다. 그중 열 명의 정탐꾼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민13:32)고 보고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사모하며 모진 고생을 근근이 견디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한순간 주저앉게 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희망인 가나안이란 줄을 싹둑 잘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에 대성통곡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14:9). 그래서 결국을 볼까요? 남을 죽이는 말을 한 자들과 그 말에 동조한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죽었고, 남을 살리는 말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입성했습니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30).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나발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정말 나발을 잘못 불어서 인생을 망친 사람입니다. 나발은 유다 광야 도시 마온에 살던 갈렙 집안사람으로, 양을 비롯한 수많은 가축 떼를 가진 거부였습니다. 그는 양털 깎는 축제 때에 부하를 시켜 식량 원조를 요구한 다윗을 모욕하고 그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삼상25:10~11). 나발은 다윗을 사울을 배반한 건달로 취급한 것입니다. 이에 다윗이 노하여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보복하러 가던 중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을 만나게 됩니다. 아비가일은 남편 몰래 많은 식량을 가지고 다윗에게 가는 중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대노한 다윗에게 “내 남편은 이름대로 미련한 자입니다. 그에게 괘념치 마시고, 여호와께서 다윗의 왕조를 세우실 것이니 그 때에 무오하셔야 하오니 칼에 피를 묻히지 마옵소서. 다만 당신이 왕이 되었을 때 이 여종을 생각하옵소서.”(삼상25:24~31)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다윗이 노를 거두었고, 이 모든 사실을 안 나발은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쓰러진 뒤 10일 후 사망했고,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훗날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남을 살리는 말을 하면 내가 살지만, 남을 죽이는 말을 하면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건입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성한 일, 가룟 유다는 죽었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사신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상 가장 말을 잘한 사람, 말을 잘해서 최대 축복을 받은 사람이 누군 줄 압니까? 바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 한편의 강도입니다. 두 명의 강도가 같이 매달렸지만, 하나는 낙원으로, 하나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말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릴 정도로 악랄한 죄를 지은 것은 둘이 똑같지만, 한 사람은 “네가 그리스도면 우리를 구원해보라.”고 비아냥거렸고, 한 사람은 그런 그를 야단치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라고 했습니다. 말 한마디가 영생을 좌우했습니다.
말을 잘하려면 말의 근원이 맑아야 합니다. 근원은 바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쓴 말이 나오는 말의 근원에 소금을 쳐야 합니다(왕하2:21). 그래야 남을 죽이는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대신 남을 살리는 말, 복된 말, 기쁨을 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소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 말들이 넘치게 되면 그 말이 닿은 곳에 사람들이 소생함을 얻고, 번성함을 얻고, 실한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겔47:8~13).
“이혼했다고? 실패한 것이 아니야. 좋은 경험을 한 거야. 하나님이 더 좋은 배필을 주실 거야.” 이렇게 말하세요. “비록 지금은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 꿈을 꿔라.” 이렇게 말하세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어.” 이렇게 말하세요. 그러면 시들시들한 사람이 살아납니다. 죽고 싶은 사람이 살고 싶어집니다. 절망 대신 희망과 소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살리는 영을 받은 자들이니까요. 할렐루야!말의 위력은 칼의 위력보다 크다.
말의 위력은
칼의 위력보다 크다
송아지는
엄마소를 닮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