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 평화를 이루자(눅2:14)
우리는 지난 10월 1일, 서울시청광장에서 ‘국가와 민족의 평화를 위한 기도성회’를 통해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함께 기도했고, 찬양과 율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저는 우리의 기도가 분명히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믿고, 기도한 대로 이 땅에 이뤄질 것을 믿습니다. 이제 이 나라에 대내외적으로 평화가 찾아올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8:31)?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겠습니까? 그래서 김정은이 쥐고 있는 핵도, 일본의 간교한 궤계도, 국내외적인 어떤 문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계란만 깨지고 낭비될 뿐, 바위는 끄떡도 없습니다.
제가 단호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현재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들에게 동일하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지시한 땅’이 아니라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으니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이상 중에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파는데, 파는 우물마다 물이 솟구쳤습니다. 샘의 근원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그랄 목자들이 자기네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삭은 다투지 않고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거기서도 물이 펑펑 나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창26:24).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고 형을 피해 외가로 도망치게 됩니다. 도망 길에 루스(벧엘)라는 곳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려는데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하나님이 너를 위하시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막막한 상황이 되어도, 앞길이 불투명해도, 사방 우겨쌈을 당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억울한 현실은 그저 허상일 뿐, 실상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평안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 우리에게도, 이 나라에게도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모세에게 바통을 물려받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동일합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수1:5~6). 모세 역시 여호수아에게 동일한 유언을 합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로 그 땅을 얻게 하라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31:7~8).
실컷 기도해놓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장래에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외적보다 무서운 것이 내적입니다. 우리끼리 싸우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싸울 때 ‘너 죽고, 나 죽자’는 말을 잘합니다. 죽을 바에는 같이 죽자는 겁니다. 정말로 싸우면 진짜 둘 다 죽습니다.
아침 햇살이 좋아 입을 벌리고 있는 조개를 도요새가 부리로 쪼니 조개가 도요새의 입을 꽉 물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엉켜 싸우고 있을 때, 마침 어부가 이를 보고는 도요새와 조개를 잡아 망태 속에 잡아넣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 ‘어부지리(漁父之利)’입니다. 서로 싸우면, 서로 분쟁하면, 서로 대결하면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말입니다.
여야가 계속 싸우면 얼씨구나 하는 곳이 있습니다. 한솥밥을 먹는 노사가 싸우면 좋아하는 곳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왜 싸웁니까? 진정 누구를 위한 싸움이고, 누구를 이롭게 하는 싸움입니까? 뱀도 자기네끼리 싸울 때는 독을 품지 않고, 말도 싸울 때 머리로 밀망정 절대 치명적인 뒷발질은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왜 한 배를 탄 사람들끼리 다투고, 왜 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끼리 대립합니까?
그러지 맙시다. 그러면 공멸할 뿐입니다. 공생해야지요. 상생해야지요. 그래야 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배가 잘 가지 않겠습니까? 대립과 대결은 멸망이요, 불행일 뿐입니다. 바다에 사는 게는 물고 뜯는데 선수입니다. 게를 큰 그릇에 담아놓으면 밖으로 나오려고 기어 올라갑니다. 그러면 밑에 있는 게가 다리를 이용해서 올라가는 게를 잡아 밑으로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자기가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놈이 또 끌어 밑으로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게를 두 마리 이상만 넣어 놓으면 거의 도망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서로 물고 뜯기 때문입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 게와 같은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끼리 게처럼 굴면 나라에, 기업에, 가정에 발전이 없습니다. 올라가게 도와줘야지요. 그러면 먼저 올라간 자가 손을 잡아 끌어주지 않겠습니까?
협력해야 합니다. 협력으로 가는 레일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기에 싸움이 없고, 사랑은 온유한 것이기에 다투지 않습니다.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기에,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기에 다투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기에 싸움이 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기에 절대 다투지 않습니다(고전13:4~7). 그래서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요13:34).
우리가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싸우고 대립하고 미워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 함께 손잡고 잘 되는 길, 모두가 사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은 십자가, 곧 플러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서로 더해지는 삶, 협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친구를 보십시오. 서로 협력하니까 불가능할 것 같았던 친구의 병도 고치게 되지 않습니까? 네 명이 협력하고 협동하니 사람이 많은 중에도 지붕을 뚫는 기지를 발휘하여 예수님 앞에 친구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외줄보다 삼겹줄이 나은 법입니다(전4:12). 우리가 협력하여 대결의 구도를 버리고 협력의 구도를 나가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돕는 길을 여사 이 나라의 난국을 타개하고 열방에 우뚝 서는 나라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대결은 멸망과 불행이요
협력은 성장과 행복이다
믿는 데가 있으면
두려움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