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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의 외통수

1002호 · 2019-05-12
오늘의 메시지

‘외통수’란 피할 다른 길이 전혀 없는 상황을 이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우리는 절망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많은 제자들은 본업인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마태는 어땠을까? 로마의 앞잡이 세리가 어디서 발붙일 수 있을까? 로마와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되고 기술 없는 자가 어디로 돌아갈까? 외통수다. 주님이 그리 인도하셨다. 주님만 의지하는 길, 외길!

나도 주님이 던지신 외통수에 걸렸다. 물질을 애타게 간구하였으나 빈털터리가 되게 하셨고, 명예와 자존심을 다 무너지게 하셨다. 나는 무소유를 원하지 않았으나 무소유의 삶 속에서 집착을 없애게 하셨다. 목회를 원치 않았으나 이 길을 걷게 하셨다.

되돌아갈 길 없는 외통수의 길! 마지막 남은 육체적 자긍심마저 말기 암으로, 대수술로 찢으시니 그마저도 버리라 이르신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6:1).

아브라함에겐 본토, 아비, 친척을 떠나라 하셨지만 내게는 처자식마저 떠나게 하셨다. 구태여 간구할 것도 없다. 오직 함께 하시기만을! ‘내 뜻대로 마옵소서!’ 기도할 뿐. 내 소욕을 거슬러 인도하시는 분. 그 존재가 확실하니 무엇을 바랄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이광주 전도사

leekjlkj@naver.com

진리의 학당

영생하는 영혼과 양식(창세기 2:16~17)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신이시다. 영생은 하나님만이 영원히 고유하게 지키실 생명이지만 한줌 흙으로 지으신 인간에게 영을 주시고 계명을 주심으로 인간 또한 하나님의 영생을 공유하게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의 세계를 눈으로 보지 못하기에 영적인 일에 대하여 흥미가 없고 애타지도 않는다. 정말 받아야 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다.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짐승과 사람을 지으셨는데, 이들은 씨 맺는 식물을 먹게 하셨으니 너도 나도 육체를 가졌기에 식물을 먹고 산다. 그런데 겉으로는 건장하고 기운이 있어 보여도 영양공급의 조화가 깨져 있으면 육체는 위기에 직면한다.

여타 생물과 달리 인자를 영접할 인간에게는 영을 주셔서 영적존재가 되게 하셨으니, 사람에게는 육체가 있고 영이 있다. 그러므로 육체가 식물을 섭취하듯 영을 위해서는 신령한 영양을 공급받아야 한다. 죽음을 지고 사는 자들이야 당연히 심판받겠지만, 구원받은 당신의 영적상태는 어떠한가? 주님 말씀하시기를, 백체가 멀쩡해도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운 것처럼(마6:19~23), 온 세상을 다 얻었다 해도 영을 위해 주신 신령한 기회를 상실하여 영적 결핍이 오면 망한다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듣고 믿는 말씀을 교훈이라 하지 않고, 생명의 양식, 진리의 말씀이라 한다. 조개껍질을 먹을 수 없지만 그 안에 먹을 것이 있듯이, 성경 그 안에는 먹을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이 있다. 세상 책들은 좋은 내용이다. 그러나 성경은 생명의 양식이요 영생의 보고(寶庫)다. 생령이 된 우리는 그 생명을 취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요6:63). 육신은 누구를 막론하고 끝날 날이 온다. 아무리 윤택하고 수려해도 결국 죽는다. 그러나 영만은 영원히 산다. 이 같은 영의 실상을 모르면 훌륭히 봉사하던 자도 어느 날 떠나고 만다. 하나님 말씀의 결핍증이 그렇다.

신령한 양식과 신령한 음료를 취해야 영혼이 부유해진다. 예수의 피를 마셔야 대속함을 받고 예수의 살을 먹어야 영생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3~57). 예수의 공로로 옛 죄에서 해방되고 구원을 받았다면 현실에서는 말씀에 절대 순종해서 영혼의 날을 예비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불순종하는 것도, 예수는 안 믿지만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정욕과는 정반대인 말씀을 심령에 모시고 순종할 때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양식이 된다(요8:31~32).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의지에는 배타성과 수동성이 있다. 왜 두 기능이 필요한가? 철든 자식이 아버지의 존재와 사랑을 알고 존중하고 공경하듯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영생을 부어주시지 않고 각인의 의식을 통해 수동적 의지로 말씀을 선택하도록 하심으로 인간의 생명과 행복이 어디에서 오며, 어떤 경로로 오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갖게 하심이다. 선악과의 계명은 사람을 살리시려는 말씀이요 사랑이지만 순종할 때만 영생의 말씀이 효력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수동(受動)하면 살고 그 사랑을 배타(排他)하면 망한다.

마귀가 인간 속에 쌓아놓은 지식과 이론과 망상의 성벽은 성령이 오셔야만 무너뜨릴 수 있다(고후10:5). 저주의 도구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누가 살리며 누가 그의 명예를 회복하겠는가? 누가 그를 죄인의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변호하겠는가?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혜사시다(요14:26/15:26). 성령은 망각된 예수이름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가 살아나신 것을 증거하게 하시고 그 증거에 대한 보증으로서 많은 이적을 행하신다. 겸손히 무릎 꿇어 능력을 구하고 성령 충만하여 육체의 소욕을 억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자. 성령의 증거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는 정욕과 거짓의 아비 마귀의 유혹을 감당할 수 없어(갈5:19~26) 영생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다. 예수이름과 영생할 영혼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며 증거의 직무를 다하자.

박덕규 목사

부르심의 소망

말씀이라는 레일을 타고

고등학교 국어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천천히 교실을 돌며 수업을 하시다 한 아이의 책상 앞에 멈춰 섰습니다. 그 책상에는 크고 흰 글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문장을 크게 읽고는 ‘기쁘시게’는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아이는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선생님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절을 그대로 쓴 건데 왜 틀렸다고 하는 거지?’ 그리고는 문장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다음 국어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겠다는 듯이 그 아이의 책상 앞으로 갔습니다. 고쳐지지 않은 문장을 보곤 불쾌한 듯 아이를 한참 쳐다보고는 이내 몸을 돌려 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매번 국어시간마다 따끔한 눈총을 받았어도 아이의 고집은 여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은 그 어떤 학문보다 가장 권위 있는 것이라는 고집입니다. 혹 그것이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시간이 흘러 그 아이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딱 한 가지 못하시는 것이 있는데 바로 거짓말을 못하신다며 말씀을 가지고 하늘을 침노하라!’고 외치며 성경 그대로 가르치려 애쓰는 한 목자를 만났고, 그 목자의 크고 청청한 나무 그늘 아래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성경 10장씩 읽고 있습니다. 영어를 배우면 외국인과 대화할 수 있는 것처럼, 마귀의 방해 없이 하나님과 원활하게 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을 말씀으로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러던 중, 집을 이사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이라 생각하고 금식을 여러 번 하며 하나님의 도움만 간절히 구했습니다. 기도가 드디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은 고린도전서 2장 9절,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평소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을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올까?’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요14:21)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자상하신 나의 아버지께서는 예배 중에 총회장 목사님의 입을 통해 한 번 더 말씀해주셨고, 그때야 비로소 이 말씀에 의지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설렘으로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정말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동네에 있는 예쁜 집을, 전혀 생각해본 적 없는 방법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께 닿았다는 사실입니다. 말이 아닌 행함으로 전해졌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만큼 중요한 것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신 것처럼 말씀을 많이 알고 있어야 마귀를 대적할 수 있고,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에 말씀으로 응답을 받으면 하나님의 의도를 빨리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꾸준히 읽기만 한다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매 예배를 통해 말씀을 알기 쉽게 잘 가르쳐주시는 총회장 목사님과 이시대 목사님이 계시니까요.

자, 이제 다시 저의 고등학교시절로 돌아가 볼까요? 졸업식을 앞두고 국어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저를 괘씸한 제자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래도 1년 동안 가르쳐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은혜를 많이 받았다며 쑥스러운 듯 웃으셨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신 하나님도 제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빙그레 웃고 계시지 않으셨을까요?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

박영신 성도

한라에 핀 샤론의 꽃

나 자신을 위한 가장 큰 사랑

‘타인은 지옥이다’, 실존주의자 샤르트르가 한 말이다. 이 말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지옥이라는 말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타인이 내 삶 속에 존재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동안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 자신이 타인에게 준 상처보다 타인이 나에게 입힌 상처만 기억하고 그 상처를 오랫동안 곱씹으며 괴로워한다. 특히 상처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현실은 물론 잠재의식에서도 원한이나 미움, 증오가 쌓여 통쾌한 복수를 꿈꾸기도 한다.

유명한 소설 「장발장」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빈곤으로 배고픔을 이기지 못했던 장발장은 빵을 훔쳤다가 19년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된다. 옥살이 후 출소한 그는 갈 곳이 없어 묵게 된 성당에서 또 다시 물건을 훔쳐 도망가다 장발장을 예의주시하던 자베르 경감에게 잡힌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을 도둑으로 지목하지 않고 은촛대까지 내어주며 그의 행동을 용서해주었다. 장발장은 미리엘 신부를 통해 은혜를 경험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그렇지만 장발장을 용서하지 못하는 한 사람, ‘한 번 도둑은 영원히 도둑이야’라고 여기며 정의를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자베르 경감이다. 우리는 저 세 사람 중 어떤 이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용서(容恕, forgiveness)’는 상대방의 허물이나 과실을 눈감아 주거나 혹은 그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고 한다. 용서는 일방적인 것이 아닌 서로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흑인인권운동가였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종신형을 받고 27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나는 내 고통과 증오를 이곳 감옥에 두고 나가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만약 그가 출소한 후에도 억울한 마음과 증오를 품고 살았다면 노벨평화상은 물론 최초의 흑인대통령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개 용서는 나 아닌 타인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용서할 수 없는 타인을 향한 미움에서 자신을 놓아주어야 나 역시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며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용서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가며 우리를 피로 사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처럼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어쩜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그 은혜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에베소서 4장 31~32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지 않고 살아갈 때 우리의 내면에는 말할 수 없는 갈등과 괴로움, 그리고 모든 악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 내면의 갈등과 괴로움, 모든 악은 내가 용서하지 못했던 타인을 용서할 때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용서’, 어쩌면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가장 큰 사랑이자 하나님이 타인을 긍휼히 여긴 그 최고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길에 핀 제비꽃처럼 자기를 짓밟는 그 군홧발에 자신의 향기를 전해주는 그런 용서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권정미 성도

jmgood77@gmail.com

신앙에세이

네 삶은 하나님 손에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들을 겪게 된다. 늘 평탄할 것 같았던 내 삶이 갑자기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굽이진 길을 헤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다가도 그 길을 통과하면 다시 산들바람을 맞으며 가벼운 걸음을 할 때가 오기도 한다. 마치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명언처럼 그 일이 지나가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인생의 여정을 알면서도 막상 힘든 일을 마주치게 되면, 먼저 걱정이 앞서고 불안감과 염려로 마음이 곧잘 동요되는 것이 사실이다. 염려함으로 내 키를 한 자라도, 내 목숨을 한 시간이라도 늘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속 긴장과 불안함은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그러한 순간마다 이 사실을 되뇐다. ‘내 삶은 여전히 하나님 손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면 마음속 긴장이 완화되며 어디서부턴가 새 힘과 담대함이 솟아난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인도하신다는 든든함이,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안정감이 나를 감싸는 것을 느낀다. 

인생을 요리에 비유하자면, 맛있는 음식이 한 가지 맛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행복한 인생 또한 평탄한 날들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 듯하다. 지나친 단맛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는 것처럼, 평탄한 날들만 있다면 그것이 결코 우리에게 이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기도는 우리 뜻대로 하더라도 응답은 하나님 뜻대로 오기 때문에, 앞에 놓인 인생의 짠맛, 매운맛, 또는 쓴맛이 당장 해결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것이다. 조물주인 하나님 손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 6:34).

박찬영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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