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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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끝까지

997호 · 2019-04-07
신앙논객

며칠 전, 한때 유행했던 커뮤니티 사이트에 들어가 우연히 예전에 교회 활동을 하면서 찍었던 사진들, 활동했던 영상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사진과 영상 속에는 지금까지도 나와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고 있는 귀한 지체들도 있는 반면, 안타깝게도 이제는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지체들도 더러 있었다. ‘얘는 참 찬양을 잘했었는데’, ‘○○선배, 정말 열정적이었지’, ‘이 친구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이 녀석은 교회 잘 다니고 있을까?’,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중에 있었던 기도모임 시간에 교육목사님께서 “우리의 과거도 하나님 뜻보다 우선시하는 우상이 될 수 있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히지 마라. 신앙은 지금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누군가 과거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 일에 매진했던 것을 깎아내리거나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의 많은 믿음의 선친들은 대부분 길게는 수십 년의 연단과 인고의 세월을 거쳐 역사의 중심에 섰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100세에 아들을 얻었고,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을 봉사했으며, 요셉은 꿈이 이루어지는 13년 동안 노예와 죄수로 살아야 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끝까지 신실하셨고,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따라 살았다. 총회장 목사님이 존경스러운 점 중의 하나는 34년 동안 목회를 하시면서 초창기 때나 지금이나 늘 변함없는 열정으로 하나님과 성도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종은 종일 뿐, 의지가 없다.”고 말씀하시며 해외집회를 다녀와 곤비한 중에도 단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찾아오는 성도들을 마다하지 않으시며 귀신을 쫓아주고 기도해주시는 모습은 매번 볼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으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시작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끝을 함께 하는 것은 아무나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지금이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는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를 부르신 자리에서 변함없이 끝까지 충성(忠誠)하자.

신혁주 전도사

blessedmic@naver.com

생명의 말씀

감사는 내 영혼을 지켜준다

인생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현미경의 관점과 망원경의 관점이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둘 다 크게 확대해서 본다는 점에는 공통적이지만, 둘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현미경은 실제로는 아주 작아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확대해서 보게 만드나 망원경은 실제로는 아주 큰데 거리가 멀어서 우리 눈에 작아 보이는 것을 실제처럼 크게 확대해서 보여준다.

우리가 불평할 때 그것은 내 인생을 현미경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불평하기 시작하면 아주 작은 문제도 점점 커 보인다. 그래서 작은 문제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큰 문제로 확대된다. 그러나 감사는 망원경과 같다. 실제로 너무나 큰 축복인데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우리가 감사하게 될 때 그것이 실제 축복으로 내게 확인되고 재발견되어진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평상시에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놀라우신 그 은혜, 하나님의 높고 광대하심이 우리에게 (망원경처럼)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며,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 감사할 때만 축복이 진정 나에게 축복이 되는 것이다.

불평은 사탄을 기쁘게 하고,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사탄은 매일매일 우리에게 속삭인다. ‘항상 낙심하라, 쉬지 말고 원망하라, 범사에 불평하라. 이는 너희를 향한 사탄의 뜻이니라.’ 그러나 성령님은 매일 우리에게 속삭이신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나는 현미경으로 내 모든 인생을 매일 불평함으로 크게 보고 있는가? 아니면 망원경으로 높고 크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찬양하며 감사하고 있는가? 우리가 감사하며 나아갈 때 내 영혼은 든든히 지켜지게 될 것이다. 어떤 영적 전쟁에도 쓰러지지 않게 되고, 내 마음속에 평안함이 넘치며 그 가운데 나의 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임택함 목사

cjcc1004@hanmail.net

내가 매일 기쁘게

정체기는 축복의 시간

지난 1월 초, 다니는 운동센터에서 진행하는 ‘다이어트 챌린지’에 나도 참가 신청을 하였다. 지난 세월, 말로만 다이어트 노래를 불렀지 뭔가 목표를 세워서 감량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나에게는 최초의 도전이자 신선한 목표였다. 그래서 정말 최선을 다해 챌린지에 집중하였다.

다이어트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체중이 변하기 전에 항상 먼저 달라지는 것이 바로 ‘눈바디’이다. 체중계의 숫자는 변함이 없지만,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말이나 거울로 비춰보는 내 모습에서 ‘눈바디’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체중이 변하기 시작한다. 한 달 정도는 신나게 눈바디와 체중이 변했지만, 2월이 시작되면서 정체기가 찾아왔다. 정해진 기한은 다가오고 체중은 변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대로 포기를 해야 하나, 그냥 2등으로 만족해야 하나?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서 나를 위해 어떤 목표를 세우고 이렇게 계획적으로 움직여본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 포기한다니 좀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우습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기도를 했다.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량을 늘리고, 집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지쳐서 쓰러질 것 같은데도 일어나 걷고 또 걸으면서 문득 비구름을 기다리던 선지자의 모습이 떠올랐고, 응답받기 위해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던 무수한 성경 속 인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간절히 바라기엔 너무 작은 소원이었지만 챌린지에 참가한 마당에 그들의 간절함이나 나의 간절함이 더는 다르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한 결과, 1등을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버텼더니 챌린지 기간이 끝나기 3일 전에 정체기가 사라지며 1등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체기는 누가 더 오래 참느냐의 문제였던 것 같다. 비단 다이어트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삶의 곳곳에 쌓인 문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기다리고 견디고 버티고 참아야 해결되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아이를 바랐던 한나의 기도와 비구름을 기다렸던 엘리야의 기도가 그랬던 것처럼, 문둥병을 고쳤던 나아만 장군도 인내심을 갖고 물속에 반복해서 들어간 것처럼, 모든 일이 다 인내와 오래 참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리는 것도,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계획하여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도, 하다못해 적금을 부어 만기가 되는 것도, 모두 누가 더 오래 참고 견디느냐의 문제이다. 몸으로 체득한 이 깨달음은 피할 수 없었던 그 기다림의 시간이 다름 아닌 기쁨과 영광을 위한 축복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돈으로도 못사는 이번 경험을 통해 내 삶의 순간마다 찾아올 정체기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기다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전훈지 집사

ppjee@hanmail.net

치우치지 않는 저울

시인하는 믿음

“형통하려면, 범사에 하나님을 시인하라!”는 총회장 목사님의 말씀을 깊이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초임장교 병과교육을 마치고, 근무할 부대로 간 첫날, 부대장님과 면담 중 저에게 종교를 물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나게 하셨습니다.”하고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소문이 나고, 저를 지켜보는 눈이 많았기에 하나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려고 더욱 노력했습니다.

중위 진급 후에는 주기적으로 야간에 당직사령(야간 또는 휴일에 지휘관을 대신하여 부대의 제반 업무를 책임지는 장교) 임무를 수행했는데, 차례가 되어 지휘통제실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 중위가 당직이니까, 오늘도 사고 없겠다.” 제가 늘 하던 말을 한 선배 장교가 오히려 먼저 꺼내며 퇴근 인사를 하길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당연합니다.”하고 하나님을 시인하고, 기도로 당직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매뉴얼에 따라 순찰을 마치고 지휘통제실에 막 돌아왔을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다른 곳에서 근무 중이던 김 상병이 ‘타는 냄새가 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그 병사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타는 냄새가 나는 곳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 연기가 보였습니다. 그곳은 야간에 사람이 없는 장소인데,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휴지통으로 추정되는 물체는 이미 녹아 형체가 없어졌고, 불이 건물 벽으로 옮겨 붙기 직전이었습니다. 급히 불을 끄고 나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있던 지휘통제실이 불이 난 곳에서 더 가까웠고, 불과 30분 전에 순찰도 돌았던 곳이었는데 저는 타는 냄새를 맡지 못했으나, 김 상병은 불이 난 곳에서 한참 멀리 있었는데도 타는 냄새를 맡았으니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김 상병이 타는 냄새를 맡지 못했거나 귀찮게 여기고 보고하지 않았다면, 혹은 그 보고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불로 번져 건물 안에서 자고 있던 수백 명의 장병들이 다치거나 생명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당직사령인 저에게 있으니 매우 곤란한 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직 근무를 시작할 때 시인한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김 상병을 통해서 큰 사고를 미리 막아주신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아찔했던 사연을 들은 선배 장교들이 “정 중위는 오는 불도 막는구나.”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으나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습니다.

군 복무하는 동안 특별히 기도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 모든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 나에게 속한 병사들이 단 한 사람도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없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기도한 것을 항상 시인했습니다. 전역을 앞두고 마지막 휴가를 떠나려던 날 밤, 급박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등병 한 명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황급히 부대로 달려갔습니다. 이등병이 자살을 결심하고 한적한 곳에 줄을 묶는 순간,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선임 병사에게 발견되어 실행하지 못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 이등병의 사연을 한참 듣고 따뜻하게 품어주었습니다. 그 후 한층 밝아져있는 그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도하고 시인한 대로 저에게 속한 병사까지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소년 다윗은 거대한 장수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실 것’이라고 시인했고(삼상17:46), 도망자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라고 고백했습니다(시3:3). 다윗은 처한 상황이 어려울 때 더욱 하나님을 시인했고, 하나님은 시인한 대로 그를 책임져주셨습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처지나 사람들의 평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전능하신 하나님께 향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현재 나 자신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꿈이 아득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내가 꿈을 향해 다가가면 그 꿈도 나에게로 다가올 것이라 믿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내가 시인한 대로 보호하신 하나님을 마음 깊이 새기며, 나의 처지와 상관없이 오늘도 나의 길을 인도하실 하나님을 시인하며 한걸음 내딛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정명관 성도

vic-777@naver.com

울림 있는 삶

우리 언니

나와 네 살 터울인 언니는 태어날 때부터 구강구조가 심하게 벌어지고 튀어나온 해괴한 모습의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그런 몸으로도 젖먹이 내 딸의 기저귀를 빨아주고 키워준 언니는 어느덧 근력이 더욱 쇠약해져 30kg의 몸무게로 부축 없이는 걷기가 힘들어졌다.

몇 달 전, 두 번이나 교회 예배 후 바지에 대변을 흘렸다. 그때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했다. ‘음식 먹을 때마다 흘리고, 운동도 안 하고….’ 언니에 대한 화를 스스로 키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때 내 앞에 스크린처럼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바로 젖먹이 때 딸의 모습이었다. 시골 친정에 맡겨졌던 딸과는 1년에 한 달도 같이 지내지 못했다. 가끔 시골에서 올라와 머물 때면 가슴 곁에 토한 젖과 분비물의 냄새마저도 달콤했었다. 직장에서 딸이 보고 싶을 때면 그 향기를 되뇌곤 했었다. “그렇다! 바로 이거다. 언니를 내 딸로 생각해야겠다.” 극적인 생각의 전환점이 탈출구를 안겨주었다. 집에 돌아와 변을 본 언니를 맨손으로 씻겨준 후 보니 단정한 모습의 언니가 너무나 예뻐 보였다. 어릴 때부터 언니와 나의 통역사 역할을 해준 딸에게 혹여 엄마가 못하더라도 천국 가는 그날까지 책임져야 한다며 유언처럼 언니를 부탁했다. 그럴 때마다 딸은 “알았으니 엄마도 이모께 더 잘해드리세요.”라고 화답한다.

치아가 거의 없는 언니에게 오늘도 생선을 발라주며 “언니, 많이 먹고 오래오래 살자.”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딸아이가 “엄마가 꼭 이모의 엄마 같네요.”라며 웃어댄다. 늦은 오후 한 상에 둘러앉은 우리 가족은 작은 함박꽃웃음을 피워낸다.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해주고 내가 자고하지 않게 삶의 균형이 되어준 나의 십자가, 그 언니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

추성숙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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