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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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하라

978호 · 2018-11-25
신앙논객

1780년, 예수를 따르던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라는 한 영국인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불만족과 변화에 대한 열망을 심으셨다. 그가 살던 18세기 영국의 빈곤층 어린이들은 공장이나 탄광에서 하루 16시간씩의 노동을 강요당했고, 그나마 일을 쉬는 일요일에는 갈 곳이 없어서 거리를 몰려다니며 싸움과 욕지거리를 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어린 아이들을 파멸시키는 빈곤과 무지의 악순환을 그냥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그는, ‘세상은 어린 아이들의 발로 전진한다!’는 구호 아래 일주일에 엿새씩 열악한 환경 가운데 처한 아이들을 돕기로 했다. 그는 “내가 무료 학교를 만들어 그들에게 읽고 쓰는 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 ‘주일학교’라고 불렀다. 그렇게 다음 세대의 교육에 비전을 품은 한 사람을 중심으로 16만 명의 자원봉사교사들이 뜻을 같이 하였고, 주일학교 운동은 불과 5년 만에 영국 전역에 퍼져 전 인구의 25%에 육박하는 125만 명의 아이들을 교육하게 되었다. 이 주일학교 운동은 영국학교 교육체계를 세우는 기초가 된다.

총회장 목사님께서는 ‘교육부재현상은 후진성을 탈피할 수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우리나라도 오늘날의 평화와 번영이 있기까지는 구한말부터 일제치하 시기까지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우리 민족을 위해 피와 땀을 뿌려가며 학교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버드, 예일, 스탠포드와 같은 미국의 수많은 명문 대학들은 기독교 사상을 기초로 세워진 학교들이며, 지금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유태인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은 민족이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완악해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게 하는 것이 지금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신혁주 전도사

blessedmic@naver.com

생명의 말씀

영역 주권의 싸움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가능성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곧 도래할 인공지능의 시대는 하나님의 자리까지도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7세기 과학의 발전으로 온 우주의 규칙과 원리들이 발견되면서, 하나님은 마치 시계를 만든 ‘장인’처럼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을 만들어만 놓았지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 무인격적 존재로 밀려났다. 점점 모든 일들이 과학과 의학의 영역으로 해결이 가능해지니, 신앙의 영역이 위축되는 듯하다. 웬만한 병은 기도 없이도 치료가 가능해진다. 의학, 과학, 첨단기술을 신봉하기 쉬워지는 시대이다.

이성과 신앙, 과학과 성경! 이 두 영역은 서로 갈등과 대립의 관계일까? 우리는 도대체 어디까지 기도해야 하고, 어디까지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영역이라 믿어야 하는가? 내가 하다가 안 되는 나머지 부분만을 하나님이 조력해주시도록 내어드리면 되는 것인가?

성경은 전 우주적 영역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신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전 우주를 통치하시고 섭리하신다. 온 우주와 인류를 창조하시고 수명과 거주지까지도 정하시고,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는 움직이고 의존하여 살도록 만드셨다(행17:24~28). 그래서 그분의 선하신 뜻이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우리는 늘 고백한다(마6:10). 세상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독립되는 것은 없다 하신다(요15:5). 아무리 과학과 의학 기술이 발전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그분이 주신 지혜로 이루어진 은총의 성과들이다. 이성과 과학과 의학? 우리는 그것들을 활용하지만, 그 설계자이시며 작동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행해야 하며,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두 마음을 품게 만든다. 이성과 신앙이라는 두 영역에서 선택을 갈등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령에 조명된 이성은 결국 신앙이 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한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지키신다고 약속하셨다(빌4:6).

송직화 목사

jesus_allinall@hanmail.net

부르심의 소망

우리 아빠

고등학교 시절, 지방의 한 동네 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11월이 되면 목사님께서는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을 따로 불러서 축복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제가 고3이었던 그 해에도 어김없이 11월이 되자, 목사님은 축복기도 해주실 날짜를 알려주시며 수험생들에게 꼭 참석하라고 광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이번에는 부모님도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축복기도를 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친구들은 모태신앙이라 아무 걱정 없었지만, 제 부모님은 교회를 매우 싫어하셨기 때문에 저는 이내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부모님께는 말도 못하고 축복기도 받기로 한 당일이 되었습니다. 기도를 받기 위해 목사님 앞에 차례차례 줄을 섰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엄마나 아빠와 손잡고 서 있었고 저는 혼자 담담하게 서있는데, 한 친구가 자기 어머니께 “엄마, 영신이 엄마 모셔오라고 했잖아.” 하며 화를 내었고, 그 어머니는 말없이 난처한 표정만 짓고 계셨습니다. 제 사정을 알고 있던 친구가 저 몰래 ‘저희 엄마 좀 모시고 오라’고 부탁했던 모양입니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더 처량해지기만 하고 그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다른 곳을 쳐다보며 못 들은 척했습니다. 그렇게 어물어물 서있다 기도를 받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신앙서적들을 읽다가, ‘내면의 아픔을 대면하고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신다’는 대목을 읽게 되었습니다. 애써 괜찮은 척했던, 고3 시절 수능을 앞두고 축복기도 받았던 그 날을 떠올리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서러웠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려니 굉장히 괴로웠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고 하나님께 제 마음을 보여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환상 중에, 축복기도를 받던 그 교회 안으로 저를 데려가셨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혼자 서있어야할 제 옆에, 예수님이 제 손을 잡고 서계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크게 말씀하셨습니다. “얘가 내 딸이야!”

이제 정식으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리 아빠’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입니다. 완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했지만 그 시간만큼 ‘우리 아빠’라는 믿음은 더 견고해졌습니다. 예전에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발끈하며 속상해했고, 손해 보는 일이 생기면 기꺼이 양보하지 못했으며, 곤란한 문제가 생기면 전전긍긍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아빠가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 하나면 충분합니다.

가끔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더 나아가지 못하고 조바심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걱정하지 마, 아빠 믿지?”

이것이 바로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며 인내할 수 있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특권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를 신뢰하며 오늘도 힘차게 한걸음 내딛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그리고 아빠 감사해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6~18).

박영신 성도

rubyday0@naver.com

프롬인터넷

고정관념

마차의 바퀴는 맨 처음,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무가 너무 쉽게 닳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닳지 않는 쇠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쿠션이 없어서 엉덩이가 너무 아팠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쇠바퀴가 굴러가는 길바닥에 고무를 깔아보기로. 여기에서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모든 길에 고무를 깔자니 비용과 노동력 소모가 너무 컸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바닥에 고무를 깔 게 아니라 바퀴에 고무를 씌우면 어떨까?”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고무가 어떻게 그 무게를 견디겠어? 너무 물렁물렁해서 절대 마차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거야.”

그러나 그 사람은 남들이 절대 안 된다는 그 일을 해내고 맙니다. 연구를 거듭한 결과 고무 속에 바람을 넣은 타이어를 개발해낸 것입니다. 순식간에 고무 길바닥과 쇠바퀴가 바뀐 것입니다.

‘그건 안 돼’, ‘예전에도 안 됐어’, 이런 고정관념은 미래로 가는 발목을 잡고 늘어집니다. 고정된 생각을 파할 때 미래가 꽃다발을 안고 달려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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