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를 이기는 습관
우리 교단은 11월 올림픽공원 전도집회를 위한 40일 작정 기도회 중이다. 총회장 목사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중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신앙이 어린 몇몇 사람들 중에 재밌는 현상을 보게 된다. 그것은 기도 실컷 해놓고 자신들의 기도거리의 근심과 걱정을 다시 안고 집으로 가는 모습이다. 이 현상이 다른 사람만일까 생각해본다.
성경에서 ‘염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림나테(merimnate)’이다. 이 말의 어원은 ‘메림나오’인데 ‘나누다’라는 뜻의 동사와 ‘마음’이라는 명사가 합쳐진 말이다. ‘염려하면 마음이 나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염려는 우리의 생각을 갈라지게 하고, 집중력을 반토막 낸다. 염려는 우리의 시각을 분산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사방팔방으로 흩어놓는다.
그렇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염려가 자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도 염려와 싸움을 해야 한다. 참 인간의 모델이요, 죄 없으신 예수님도 염려와 싸우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무려 세 번씩이나 반복하며 기도하셨다(마26:36~44). 예수님도 인간의 마음으로 염려하셨지만, 염려와 싸워 이기신 것이다. 예수님은 두려움을 하늘 아버지께 내어 맡기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이겨내셨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하여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 하나님은 바울의 펜을 사용하셔서 염려를 이기는 습관을 알려주셨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즉 염려를 이기는 비결은 ‘기도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염려를 잠시 내려놓으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 염려를 아뢰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주님과 대화하는 기도시간을 가져야 한다. 기도시간이 길어질수록 염려는 줄어들고, 기도시간이 짧아질수록 염려는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정금 전도사
jungkm@nate.com
목사님의 경구(警句)
내가 아는 목사님은 문무(文武)를 따지자면 용맹한 무장에 가까우신 분이다.
그러나 지근거리에서 새롭게 느끼는 목사님은 다윗과 같이 문무와 예(藝)를 겸한 분임을 새롭게 느낀다.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은 사자성어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정문일침(頂門一鍼,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는 따끔한 충고나 교훈을 이르는 말)이요, 일침견혈(一針見血, 어떤 일의 본질을 파악하여 단번에 정곡을 찌름을 비유하는 말)이다.
내가 특히 감탄한 목사님의 경구는, 1. 귀명창이 명창이다: 창을 하든 대화를 하든 목회를 하든 듣는 것이 우선이라는 뜻인데, 매우 탄복한 경구이자 내 삶에 큰 지침이 되고 있다. 2. 믿음은 거룩한 협박이다: 위독한 권사님이 병문안 오시기를 여러 번 강청하니 목사님께서 새벽에 짬을 내서 오셨다. ‘죄송합니다. 제가 목사님을 번거롭게 했습니다.’하니 대답하신 말씀이다. 3. 복음은 장엄한 선포다: 어찌 그리 담대히 앞일을 예견하시고 확신하실까 궁금한 터에 와 닿은 말씀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도 이삭이 번제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하나님께서 번제 할 어린 양을 준비하셨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종들에게는 ‘내 아들 이삭과 같이 내려올 것이다.’라고 말함은 하나님께는 믿음의 거룩한 협박이며 복음의 선포 아닌가? 4. 왜 땅을 치고 우는가: 그야말로 땅을 치며 웃었다. 내 탓을 해야지 왜 남을 탓하느냐? 내 가슴을 치면서 울어야지 왜 땅을 치며 우느냐. 땅이 무슨 죄 인가.
촌철살인(寸鐵殺人, 간단한 경구(警句)나 단어로 사람을 감동시키며 사물의 급소를 찌름)의 목사님. 항상 0688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광주 전도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신사임당은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율곡 이이 선생을 낳고 교육시킨 어머니의 위치로서만 우리나라 여성인물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와 문장 글씨와 그림은 남성 위주의 조선시대에도 탁월하였다.
이런 일화가 있다. 신사임당이 한 혼인 잔치에 갔는데, 어떤 가난한 아낙이 빌려 입고 온 비단치마에 음식물이 떨어지는 바람에 얼룩이 져서 울상인 것을 보고 그 부인에게 그 치마를 잠시만 빌려달라고 했다. 그 치마를 받아든 신사임당이 치마의 얼룩진 부분에 몇 번 그림붓을 가져다 대었다. 붓이 움직일 때마다 그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치마위에 아름다운 포도가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임당은 그 자리에서 얼룩이 진 비단 치마폭에 포도 줄기와 풍성한 포도송이들을 그려주었고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 빌려온 치마 값을 갚아주도록 하였다.
나는 우리 인생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그런 치마폭이요, 화선지라 생각한다. 아무리 지금 잉크로 얼룩져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아주 멋진 그림으로 그려내실 것이다. 그러니 지금 잉크 자국을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이다. 왜냐면 그 잉크 자국은 화가로 무언가 생각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영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고 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신앙생활은 자기생각에 맞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은 말씀을 좇아갔고(창12:4), 예수님도 십자가 지실 때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뜻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무언가 더 큰 계획을 가지시고, 지금 붓을 들어 멋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신 것이다.
임택함 목사
cjcc1004@hanmail.net
소망이 가진 힘
슬픔과 기쁨, 고난과 소망, 어두움과 밝음은 언제나 우리 인생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이 모든 단어들의 표기는 다르지만 각각의 의미는 같지 않을까 싶다.
‘인생 참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인생이란 결코 아름답게 굴러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우리는 로마서 8장 17~18절의 말씀을 깊게 묵상하면 인생에서 겪는 고난이 축복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친구가 물어왔다. “넌 어떻게 이 시간을 버텼어?” 나는 2013년 3월 박사과정에 입학해 2016년 2월에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3년 만에 모든 과정을 마친 셈이다. 그땐 읽어야하는 논문과 전공서적, 그리고 써야하는 연구과제로 하루가 멀다 하고 주어진 연구실에서 밤새는 일이 많았다. 특히 박사논문을 쓰는 과정은 한 가지 이상의 지병을 얻는다는 말이 돌만큼 고통의 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논문심사 때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일은 죽기보다도 싫었다. 다시금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박사학위’라는 소망이 있기에 견뎌낼 수 있었다.
고난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약간의 고난에도 덜덜 떨고 쉬이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고난을 잘 이해하고 미래에 대한 작은 기대와 설렘으로 그 시간을 이겨내는 사람이다. 누구의 삶의 질이 더 높을까? 그렇다.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소망이 있는 사람, 설레는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호아킴 데 모사다의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에서는 지금 당장 맛이 좋고, 행복하고, 여행하고 싶고, 즐기는 삶을 살 수 있지만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미래는 힘들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누구나 성공하는 인생을 꿈꾸며, 성공한 사람을 동경한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인내하며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난 3월 대학교수의 길을 선택한 후 나의 삶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여러 상황에 몸도 마음도 곤고해져 매일같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가운데 말씀을 묵상하며 깨달은 것이 모든 신앙의 근원은 ‘장차’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진퇴양난이라는 상황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장차 큰일을 이루고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인데, 우리는 모든 희로애락을 현재, 지금에 두기 때문에 약간의 힘듦과 고난에도 쉽게 넘어지고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5). 믿는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결코 고난이 면제된 축복이 아니다. 즉 소망하는 것을 이루려면 힘들고 어려운 시간도 잘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기에 앞을 내다볼 수 없더라도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함께 하시면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요셉과 바울처럼 탈선하지 않고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어렵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고통은 죽음으로 인한 고통이 아닌 생명이 태어나는 희망의 고통인 산통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또한 로마서 8장 18절에 기록된 ‘장차’라고 하신 약속을 믿고 삶 속의 고난을 통해 ‘소망이 가진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 경험하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Dr. 권정미 집사
jmgood77@gmail.com
진리로 무장한 인생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3).
크리스천이면 대부분 다 아는 말씀 구절이다. ‘그의 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는 나라, 천국을 말한다. ‘그의 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바로 예수님의 보혈로 회개하면 내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의다.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셋째 하늘이기도 하지만, 나의 심령이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는 상태이면 내 마음도 바로 천국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고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여기까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그 행위’는 무엇일까?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태복음12:28).
회개가 그의 의를 구하는 행위라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 즉 악한 영을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하며 선포하는 것은 그의 나라를 구하는 행위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의 의는 잘 구하지만,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잘 모르는 듯하다.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비난하는 교회도 있으니 말이다.
회개하면 천국이 가까워지고, 성령을 힘입어 악한 영을 쫓아내면 천국이 임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전제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지 혜택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모든 자에게 제공될 것이다. 이제는 천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시민에겐 그러한 혜택에 대한 권리가 주어지기 때문에(빌3:20).
박찬영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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