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있으면 실탄을 준비하라 (약2:10~17)
살아있는 것은 다 움직입니다. 그러나 죽은 것는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죽은 것은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자는 어떤 자일까요? 말하나마나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단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2:26).
현재 기독교인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마치 총은 최신형으로 멋진 것을 가지고 있으나 총알이 없는 자와 같고, 옷은 잘 입고 명품백은 들었으나 실제 그 백 속에 돈은 하나도 없는 상태와 같습니다. 또 성경적 지식은 너무 많아 머리는 커졌는데, 움직이지 않아 다리는 얇디얇은 가분수인 모습입니다. 그러니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넘어져 다칩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명함은 있으나,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물론 행함만으로 구원은 받을 수 없습니다(롬3:20). 그러나 행함이 동반된 믿음이 있을 때 그것이 신실한 믿음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1~2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브라함이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그 믿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그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야 비로소 그의 의로움이 입증되었습니다.
또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5)는 말씀도 있습니다. 라합의 이야기는 여호수아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으나 산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라합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2:11)고 고백함으로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로 고백한 것뿐 아니라 여호수아가 파견한 두 정탐군을 영접하고 안전하게 다른 길로 피신시켜줌으로 그의 믿음을 입증했고, 하나님은 그녀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런 행함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했을 때 그녀와 가족들이 죽임을 당치 않았고(히11:31),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에도 당당히 오를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11: 31)라고 말씀합니다. ‘순종하지 아니한 자’는 곧 행함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에 움직이는 것, 행동하는 믿음은 다른 말로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참 믿음이요, 산 믿음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1:18~19)고 한 것입니다.
매주 우리는 주의 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듣고 ‘설교 참 좋았어. 은혜로웠어.’ 하고 끝나면 안 됩니다. 들은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맞지만(롬10:10), 그것을 행할 때 그 믿음이 입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함은 실과 바늘과 같고, 노와 배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2:15~16)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은 무의미합니다. 이 말은 ‘내 앞에서 알짱대지 말고 어서 가라’는 말을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자에게 주는 경고가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25:42~43).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으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수 있음을, 그래서 영멸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9:29)는 말씀도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기사와 표적, 기적은 기도를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기도를 안 합니다. 기도를 안 하니까 마귀의 밥이 되어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총이 있어도 총알이 없으니 짐승에게 당할 수밖에요. 여러분,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여러분이 광야에서 메추라기를 잡아야 몇 마리나 잡겠습니까? 또 회개하여 성령을 받아야 하고, 말로만이 아닌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 그리고 옥에 있는 자들을 살펴야 합니다. 거짓을 멀리하고 진실되게 살아야 합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하고,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매지 않아야 합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벧전3:1~2)라는 말씀을 봅시다. 안 믿는 남편을 둔 아내가 주일마다 ‘교회 가자, 안 가면 지옥 간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행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믿음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집에서는 소리나 버럭버럭 지르고, 구역예배 간다고 남편 밥도 안 해놓고 설거지도 안하고 집안을 엉망으로 해놓고 나가버리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어떻게 확증하실 겁니까? 행함으로 확증해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분명히 보입니다. 행동으로 옮길 때 믿음이 확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위치를 올려야 불이 들어와 전기가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듯 말입니다.
여러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행함=기적과 축복’이며,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함으로 그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약2:22).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행함을 통하여 하나님께 보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손바닥을 서로 비비면 열이 납니다. 이걸 어떻게 압니까? 비벼봤기 때문에 압니다. 그런 자는 ‘아! 손바닥만 비벼도 열이 나니까 나가서 뛰면 더욱 열이 발생하여 건강해지겠구나.’ 하고는 나가서 운동하게 됩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확증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오는 것을 아는 자는 더욱 행함으로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행함이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좋지 않은 것은 바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만한 행동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비난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줍시다.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죽은 신앙이 아니라 산 믿음, 산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께 인정받고, 세상에 인정받는 자들이 됩시다. 할렐루야!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고
서 말 구슬도 꿰어야 보배다
위인은 결단하고 행동하나
바보는 매일 결심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