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노예가 된 자는 어리석은 자다 (사43:18~25)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가 누구일까요? 바로 과거의 노예가 되어 사는 자입니다. 과거에 매몰되어 사는 자, 과거라는 사슬에 얽매어 옴짝달싹도 못하며 사는 자가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왜요? 절대 그런 자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43:18~19). ‘너희가 과거에 얽매이면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습니다. 과거는 부도난 수표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난 일은 잊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베드로가 어린 비자 앞에서 스승인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베드로가 그런 겁니다. 대역 죄인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그는 그 죄에 눌려 살았습니다. 예전처럼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갔지만 의욕도 없이 그저 그물만 던져놓고 무의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무슨 미래가 있었겠습니까? 어느 날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고기를 구워 허기를 채워주신 후에 묻습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동일하게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7). 예수님은 베드로를 크게 사용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베드로가 과거 죄의 사슬에 얽매인 것을 아시고 그것부터 잘라내게 하신 것입니다. 이미 그는 닭이 우는 소리에 회개했지만, 여전히 죄에 눌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잘라내신 후에 주님이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새로운 목표, 비전, 미래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그렇습니다. 과거를 잘라내야 미래가 있습니다. 과거의 죄, 실수는 회개하면 잘라집니다. 회개하고도 그것에 눌려있다면 용서의 하나님을 무시하는 꼴이 됩니다. 무디는 ‘사람이 회개 한 것을 또 회개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7:18~19).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8:12). 회개하면 용서하신다는 겁니다. 용서란 안 보이는 곳에 죄를 놓는 게 아니라 깊은 바다에 던져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과거를 잘라내지 못했다면 대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그가 과거를 청산했기에 사도요, 전도자로서 새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물가의 여인도 과거 여섯 남자를 데리고 사는 부끄러운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회개했기에 동네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 역시 목사 될 자격이 없으나 과거를 회개했기에 당당히 주의 종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시집을 왔으면 친정을 잊어야 잘 삽니다. 그저 늘 친정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걸핏하면 찾아가서 하소연하면 절대 결혼생활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민족이 자그마한 일에도 불평하고 낙심한 것은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이 좋았어. 그나마 그 때가 나았지.’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나안이라는 미래가 다가오지 못하고 다음세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푯대를 좇아가는 일을 함에 있어 먼저 한 일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전 일을 잊는 것이 새 일의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고 하시며 과거의 사슬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악한 마귀는 과거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마르틴 루터에게도 어김없이 마귀가 나타나서 과거를 들췄습니다. 그 때 루터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래, 나 그런 사람이었어. 근데 그게 어떻다는 거야. 과거는 다 회개했고, 하나님이 용서하셨는데 어쩌라는 거야.” 그렇게 당당하게 과거를 청산했다는 믿음을 선포하고 마침내 그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것을 다 아십니다. 다만 과거를 청산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도 잊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학문의 최고 상아탑인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로마 시민권자인 과거의 자기를 배설물처럼 여겨 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이런 사람이었는데…’ 하며 과거의 영광만을 운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개는 궁상떨며 살고 있습니다.
왜 과거를 끊어내지 못하는 줄 압니까?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잘못했다는 소리가 안 나오는 겁니다. 사울이 그랬고,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죄에 대해 변호하느라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막다른 데 도달하니 자살한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이었지만 나단 선지자의 말에 바로 잘못을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는 새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자존심을 세우려면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에 자존심을 버려 자존심을 세운 사람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그 사람의 형편이 안 좋을 때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마땅히 친구를 대접할 길이 없는 이 사람은 친한 친구를 찾아갑니다. 그것도 밤에 말입니다. 자존심을 버린 겁니다. 그 사람은 친구 집의 대문을 두드리며 보리떡을 강청합니다. 친구는 귀찮고 짜증났지만 행여 잠든 가족들이 깰까봐 이 사람에게 보리떡을 줍니다. 그 보리떡으로 이 사람은 찾아온 친구를 넉넉히 대접하고 자존심을 세웁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뽕나무로 올라간 삭개오를 보고 예수님이 그의 집에 머무신 것 아닙니까? 딸을 고치기 위해 개 취급을 받았지만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 앞에 부복한 수로보니게 여인도 동일합니다. 잠깐 자존심이 밟힐 수 있지만 목적한 바를 이루면 자존심이 다시 사는 것 아닙니까? 자존심이 밥 먹여주지 않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 무슨 자존심입니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도 수치와 부끄러움과 자존심을 버리고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말입니다. 목적을 이루는데 자존심은 사치요, 걸림돌일 뿐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계속 자존심을 세웠다면 그는 계속 문둥병 환자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버릴 때 새 삶이 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광야 같은 삶에 길이 나고, 사막 같은 삶에 강이 나길 원하십니까? 과거를 잘라내십시오. 과거의 죄는 회개하여 청산하고, 과거의 영광도 잘라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삶 속에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황무지 같은 삶에 꽃이 피고, 마른 땅에 샘이 흐를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할렐루야!
고름이 결단코
살 되지 않는다
이미 흘러가버린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