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관계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우리와 친밀하게 사랑을 나누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독처하는 아담을 좋지 않게 보신 것도 역으로 생각해보면 하나님 스스로 고독하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과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아가길 원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2:19). 이 말씀을 보면 마치 사랑스런 자식에게 각종 장난감을 사주고 즐거이 뛰노는 아이를 바라보며 대견해하는 아비의 넉넉한 미소를 느끼게 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은 멀리한 채 제 갈 길로 가며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다. 어찌 이스라엘 백성뿐일까?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 결국에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을 좇아온 것이 인류역사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스로 이 땅에 내려와 죽음을 택하시면서 까지 인간을 세상에서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절정을 몸소 나타내셨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가 얼마나 될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사랑의 무게가 얼마나 큰 지 깨달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살아가며 무수히 하나님을 실망시킨다. 죄 짓고, 또 죄 짓고,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듯 계속 범죄한다. 연약한 육신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로 회개하고서도 또 이겨내지 못하는 수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아비를 멀리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의 탁월한 선택은 자신의 잘못에 매몰되지 아니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 가운데 유독 실수가 잦고 뭔가 시원찮아 보이는데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를 볼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더욱 성숙해지고 인격적으로도 흠 없이 성장해가길 원하신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 육신의 아비처럼 친밀하고 살갑게 대하는 것이다. 좀 야단맞았다고 방에 처박혀 웅크리고 있는 자식보다는 잘못했다며 품으로 달려드는 자식이 더 사랑스러운 법이다.
목사님이 말씀하셨듯이 ‘죄가 문제가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았음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죄에 얽매여 종노릇하지 말고, 담대히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유로운 삶을 누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