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함을 향한 습관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는 속담이 있다. 한꺼번에 많은 물을 바위에 부으면 바위를 그저 젖게 만들 뿐이지만, 한 방울씩 꾸준하게 떨어지는 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바위를 깊게 깎아낸다는 말이다.
열정에 휩싸이면 무엇이든 이루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감정이 들지만 나의 경험상 그것은 그때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야심차게 신년계획을 세우지만 계획했던 일들을 다 이루지는 못하는 것처럼, 일순간에 드는 감정은 돌만 젖게 만들 뿐 돌을 깎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느 분야에 탁월한 사람들을 보면 열정에 차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마치 그렇게 사는 것이 일상인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많은 일들을 한다. 그렇게 보면 열정이라는 것은 마음속의 뜨거움을 한 순간에 표출해내는 것이 아닌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는 끈기에 가깝다. 마음속 뜨거움이 동기는 될 수 있지만 일을 유지하고 완결 짓는 것은 결국 꾸준함이란 생각이 든다. 그들은 낙숫물이 매일 바위에 떨어지듯 매일 매일의 외로운 노력을 통해 조금씩 더 성장했을 뿐이다.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어떤 일을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 순간의 열정, 냄비 같은 열정 때문이다. 꾸준히 하는 습관이 없어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핑계거리를 찾기보다는 ‘그냥 일단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작은 습관을 만들기 시작한다면 미래에는 탁월해진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께 특별히 사랑받는 것 같은 사람이나 믿음 좋은 사람을 부러워만 하기보단 매일의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탁월한 믿음을 가지는 방법일 것 같다.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습관들을 훈련해 일상의 태도를 거룩하게 만들어보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
김성일 형제
cre8tor@naver.com
하나님의 보좌와 영광 (시96:1~13, 행7:54~60)
하나님은 영광 중에 계신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없으시니 곧 빛이시다(요일1:5). ‘믿습니다. 복 주시옵소서!’ 라는 신념적 주장보다 우리는 배워야 하고 이를 위해 가르치는 일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참 신앙이 된다.
하나님의 존귀와 능력과 품성과 역사는 모두 그 말씀에 나타나고, 그 말씀 안에 생명과 영광이 있다(요1: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이는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독생자의 영광이시다(요1:14). 그 영광을 후사이신 아들에게 주셨으므로(요17:5, 8:12),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어떻게 보이느냐? 은혜와 진리로 보게 된다(요1:14). 그래서 ‘은혜를 받았다’ 함은 그 영광을 소유했다 함이요, ‘진리를 안다’함은 곧 그 독생자를 모셨다 함이니 이러한 절차로써 성령이 임하여 계신 나의 심령도 성전이므로(고전3:16) 하늘보좌에 있는 영광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4).
스데반이 본 영광을 사울은 몰랐다(행7:54~60). 그래서 그 영광을 보고 아는 자에게 돌질하고 죽였음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옳은 것으로 믿어졌다. 사울은 그늘진 인생이요, 스데반은 빛난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어두움은 눈을 멀게 하여 그 앞을 막아선다(요일2:8~11). 어두운 길에 행하고 있던 사울에게 참 빛이 비췄다(행22:6~8). 예수의 영광이 사울의 심령에 비취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았다. 그래서 과거를 청산하고 빛의 인생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시다(히1:2~3). 마치 태양으로 빛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는 하나님 속에 있는 영광을 비취는 빛이시다. 이 빛을 우리 심령에 비춰 주심으로써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되어 그 영광을 받는다(고후4:3~6).
죄가 불행한 것은 영광을 가로막아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롬3:23). 죄는 미련한 마음이 우준하고 어두워져,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 대신 변하여 썩어질 것으로 우상을 삼는다(롬1:21~23). 마음이 어두우니 번민, 갈등, 부정적 생각, 불길한 생각 등을 떨쳐내지 못하고 심난한 일, 두려운 일로 고통당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접견할 능력이 없다.
독생자의 영광을 보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져 태양이 비치는 것처럼 밝은 생각으로 바뀐다. ‘네가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요11:40), 내 이름을 경외하는 자에게 의로운 해 떠오르고, 치료의 광선이 발한다(말4:2),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된다(요14:13), 부활할 때 홀연히 변화되어 그 영광의 보좌에 올라간다(고전15:51)’고 빛이신 그가 말씀하셨다. 그 생명의 빛인 영광을 세세토록 누리는 것이 영생이다(요8:11). 이 땅의 고난이나 슬픔을 인내해야 하는 것은 그 영광의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함이다(롬8:16~17). 믿음에 따르는 표적으로 영광을 본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영광이요, 흑암에는(유6) 사망과 거짓뿐이다. 이 흑암에 갇혀있는 자가 누구인가? 흑암의 권세자 마귀 아닌가(골1:13)? 태양 아래서는 얼마든지 숨고 조작하고 왕 노릇하므로 도처에 마귀의 성질이 나타나 죽음과 거짓이 횡행하고 있지만, 영광 앞에서는 도무지 숨지 못하고 망하고 있지 않는가(막1:23~27)?
죄인의 슬픔이란 바로 흑암의 권세아래 사는 것이니, 곧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것이다. 영광이 있지만 그것 모르고 여전히 그늘 속에 살던 인생이 잃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받게 된 이것이 구원이요 생명이다. 그러나 멸망할 자에게는 멀고도 먼 얘기다. 거룩함이 없으면 영광은 비취지 않는다. 비록 예배하고 정성들인다 해도 겸손하지 않으면 영광은 오지 않는다. 순종하지 않으면 영광은 꿈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알면서도 게을러 기도하지 않고 교만해서 영광을 상실한 채 산다면 얼마나 참담한가? 영광의 권세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사용하자!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시24:10).
박덕규 목사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진주를 주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는 말씀은 목사님께서 자주 해주신 말씀이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적절하지 않은 곳에 선의를 베풀고는 실의에 빠진다.
약 3개월 동안 대입자소서 첨삭을 봐준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이 자신의 진정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좋은 글을 써서 합격할 수 있도록 지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학부모에게 항의가 있었다. 돈 낸 만큼 해주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자소서를 대리 작성해주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학생에게 선생님들이 대리 작성한 글은 서류 전형에서 탈락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학생이나 학부모는 계속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나에게 짜증을 부렸다.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더 이상 이야기를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된 선생이나 아이의 가능성을 끌어낼 수 있는 선생을 원하는 것이 아닌 이상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 싶었다.
얼마 전, 한 단체에서 오래 준비해온 행사에 급히 추가모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고생해온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자 모금에 참여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더니,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얹을 생각이냐고 따져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옹졸한 생각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 능력이 되는 선에서 도움을 주고자 손길을 내미는데 왜 그들은 그 정도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지 참 안타까웠다. 내가 가진 진주를 그들에게 주고 싶지만 그 학생도, 그 단체도 왜 받지를 못하는지 답답했다. 나의 의도를 왜곡하고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며 손가락질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의 억울함과 답답함을 아는 이는 역시 하나님 밖에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진정시켰다. 답답해 성경책을 뒤적거리다 로마서를 읽게 되었다. 될 수 있으면 화목하게 지내고, 억울한 일이 생길 때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신원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롬12:17~21). 그 뒤에 이어진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내 선의가 배척을 당할 때만큼 속상한 일은 없다. 너무 억울하고 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의 자녀이니 화목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소중한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싶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고 내 선의가 선의 그대로 전달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목사님께서는 우리에게 ‘만남의 축복을 허락해주시기를’ 자주 기도해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진주의 값어치를 알고 나만큼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많았으면 좋겠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만남의 축복을 다시 한 번 기도해본다.
전훈지 자매
ppjee@hanmail.net
갓을 쓰고 다니는 조선인
옛날 선교 초기, 조선에 온 미국인 선교사가 보니 양반들은 모두 머리에 갓을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하여 한 유식한 양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 머리에 쓴 것이 무엇이요?”
“갓이요.”
“아니 갓이라니! 갓(God)이면 하나님인데 조선 사람들은 머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다니니 하나님의 영이 이미 그들에게 임했다는 것 아닌가?”
선교사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 이름이 무엇이요?”
양반은 우리나라 이름을 한자(漢字)로 쓰며 대답했습니다.
“조선(朝鮮)이요! ‘아침 朝 +깨끗할 鮮’ 이렇게 씁니다.”라고 대답하며 글자를 써보였습니다.
그 선교사는 더욱 깜짝 놀라 “깨끗한 아침의 나라, Morning calm의 나라란 말이 맞는구나.”라고 말하고는 조선의 ‘朝’자를 풀이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양반은 천천히 글자를 쓰면서 대답했습니다.
“먼저 열十자를 쓰고 그 밑에 낮이라는 뜻의 날日자를 쓰고 또 열十자를 쓰고 그 곁에 밤이라는 뜻의 달月자를 썼습니다. 이렇게요. 십자가十, 날일日, 십자가十, 달월月.”
선교사는 놀라서 중얼거렸습니다.
“낮(日)에도 십자가(十), 밤(月)에도 십자가(十), 하루 종일 십자가라는 뜻이구나.”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선鮮자도 풀이해주시오.”
“물고기魚 옆에 양羊자를 씁니다.”
선교사가 다시 놀라며 말했습니다.
“물고기는 초대 교회의 상징인 ‘익투스’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고, 또 羊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니 鮮자는 완전히 신앙고백의 글자입니다.”
선교사는 감탄하여 말하길 “朝鮮이라는 나라는 이름부터가 낮이나 밤이나 십자가만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이신 어린 양이라는 신앙고백적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조선은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복음의 나라로다.”
감탄을 하며 선교사가 또 질문을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 사람을 영어로는 어떻게 쓰나요?”
“Chosen People이라고 씁니다.”
“와우! 선택된(Chosen) 사람들(People), 조선은 과연 동방의 선민(選民) 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바보가 되어 이성을 잃어버리고 무모한 일처럼 보이는 일에 목숨까지 걸 때가 있습니다.
호주의 한 청년이 죽은 뒤에 ‘용감한 시민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유람선을 타고 해안을 지나던 중 여자 친구와 함께 실종되었습니다. 배에 설치된 CCTV를 분석한 결과, 여자 친구가 배에서 미끄러져 어둔 바다 속에 빠지자 그 청년은 지체 없이 깊은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함께 실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더 무모한 사랑을 하셨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을 위하여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죄인 된 우리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천상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온갖 수욕을 다 당하시고 물과 피를 쏟으며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위대한 사랑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든 죄 값을 속량하고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악한 마귀의 궤계에 넘어가면 아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체험하고 모두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상화평 목사
sanghwapyung@hanmail.net
독서의 놀라운 힘
작년 2017년 한해는 나에게 있어 놀라운 변화의 한 해였다. 그 이유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17년 첫째 주 이시대 목사님의 수요예배 설교, ‘성장은 전력투구하는 자만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직장생활에 그냥 만족하며 자기계발 없이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책을 임계점이 넘는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읽어야겠구나.’ 라고 마음먹게 되었다.
설교를 들으며 그 자리에서 바로 실행 가능한 목표를 잡아보았다. 1주일에 두 권을 읽으면 1년 52주 총 104권이 되니 1년에 100권을 넘게 읽게 되는 셈이었기에, ‘이번 주부터 1주일에 2권씩 읽어보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고 바로 도전을 시작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어려웠다. 직장 생활하랴, 교회 생활하랴 1주일에 2권 읽기 목표 달성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차츰 습관이 잡히며 짬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어느덧 읽기 속도도 빨라졌다. 결국 연말이 되어 목표한 100권을 모두 완독하였고, 독서하며 깨달은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여 블로그에 올려 블로그 관리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속도를 내어 2018년 올해에는 1주일에 3권을 읽고 있다.
책을 꾸준히 읽다 보니 말할 수 없이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예전에 안 보이던 부분들이, 그리고 남들이 볼 수 없는 부분들까지 이제는 보이기 시작한다. 성장과 성공의 길로 향하는 철길이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놓여 있는지 알 것 같고, 그 위에 나라는 기차를 올려놓기 위해 매진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총회장 목사님은 늘 지식과 지혜의 향기를 내는 젊은이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을 꾸준히 읽고 독서를 통해 자신을 발전시키고 성장시키다 보면 언젠간 분명히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지식과 지혜의 향기를 발산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장명훈 집사
jjoshua@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