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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944호 · 2018-04-01
아름다운 인생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 기독교 고전인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책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모든 문제들과 상황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하다보면 어려움도 겪지만, 결국 그런 사람들로 인해 환경이 변화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중 마을에 있던 술집이 문을 닫고 많은 사람들이 다 함께 예배를 드리며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구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교회 성도님들이라면 익숙한 말일 것이다. 총회장 목사님께서 이 문구를 사무실에 걸어놓고 누군가를 만나거나 상담을 해주실 때마다 생각하신다고 하셨다. 중고등부 교사의 십계명이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이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제자들에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먼저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할 수 없었던 일들과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 해결되었고, 뿐만 아니라 그 문제 가운데에서 평안함을 얻을 수 있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없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제일중심으로 사는 삶의 기초요, 초석은 매사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절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며, 절대 악을 행치 않으며,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은성

es2563@naver.com

To Be Succeeded

영원한 생명, 예수

‘나 가진 재물 없으나’로 시작하는 찬양을 작시한 송명희 시인은 태어났을 때 의사의 실수로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다. 어둠과 고통의 사춘기 시절을 겪으며 부르짖다 하나님을 만난 이후 어느 날 미국에서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소개받는데, 그녀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습 그대로 살겠다며 담담하게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스스로는 서지도 걷지도 못하고 제대로 말조차 할 수 없는 그 모습 그대로가 결코 좋아서가 아니다. 외형과 건강은 그대로였지만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부터 이전에는 맛볼 수 없었던 참 기쁨과 참 평강을 소유케 되었기 때문이리라.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입은, 그야말로 온 천하보다 귀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마치 생명이 없는 자들처럼 좌절과 원망, 시기와 질투, 분열과 분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살곤 한다. 인생과 영생의 지극히 일부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상들만 계수하기에 쉽게 교만하기도 하고 또 좌절하기도 하나, 내 영혼은 생명 길 되는 이 좁은 길을 걷게 하심을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해야 한다. 욥이 깊은 고난 가운데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원망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고는 재 가운데 회개한 것처럼, 창세전부터 택정하신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과 값없이 베푸신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할 때, 미움도 비판도 원망도 분쟁도…, 실로 그 어떤 것도 다 부질없는 일들이다.

영원한 생명, 부활을 소유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하신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데려가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이렇게 살 때 기쁨으로 좁은 길을 걸을 힘을 공급받고,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삶을 살 수 있다.

부활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흑암 가운데 살 수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만으로도 이미 감사할 이유는 넘친다. 영원히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아니하는 생명의 떡 되신 예수, 우리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예수로 말미암아 주신 생명을 누리되, 풍성히 누리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이국진

joyful_jina@hanmail.net

생명의 말씀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유난히 장난감 욕심이 많은 둘째 아들의 유치원생 때 일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들에게 바로바로 사주지 않고 마트에서 구경만 시키고 특별한 날을 정하여 아주 오래도록 기다리게 했다. 그랬더니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한다. 그 장난감 그림을 인터넷으로 찾아 인쇄하고 기도문까지 적어 항상 그 종이를 애지중지 끼고 다니고, 잠자기 전 무릎 꿇고 엉덩이를 치켜 올리고 간절히 기도를 한다. 바라보고 기대하게 했더니 하루하루를 그 다가오는 작은 희망으로 지내는 모습을 보았다.

‘The best is yet to come(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나아질 미래를 암시하는 이 문구를 나는 참 좋아한다. 이는 종교의 자유를 갈망하며 신대륙으로 떠난 청교도들의 신앙고백이다. 낯선 땅, 개척의 고단한 삶 가운데서 다가올 최고의 순간을 갈망하며 현실을 극복하게 하는 희망적 선언이었다. 이 고백은 모든 믿는 자들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에는 ‘선’

(善)이 승리하고, ‘최고선(最高善)’으로 이끄실 하나님을 믿기에 고통의 현실도 감내한다. 종교개혁가 루터도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희망’이라고 말했다.

‘희망’은 기독교 특유의 것이다. 기독교의 기초가 형성되던 초대교회 때, 이 세상의 선과 악의 대립구조를 ‘희망 없음’으로 선언한 철학적 도전들이 있어왔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악’까지도 제한적으로 허용하시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주권대로 승리하심을 믿는 신앙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최고의 순간을 희망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순교를 불사케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믿는 자의 마지막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죄가 없는, 최상의 상태이다. 그러기에 죄악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셔서 신분의 변화만이 아니라, 수준의 변화도 요구하신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벧후1:4)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 ‘거룩’은 죄악된 인간이 감히 다다를 수 없는 희망고문의 영역이 아니라 이루어주실 확실한 희망이다. 그렇게 되도록 내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시기에 가능하다. 우리의 영원한 기업의 확실한 보증(엡1:14)이 되셔서 그 희망을 이루신다.

송직화 목사

jesus_allinall@hanmail.net

청춘

들을 귀

예수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육지에 모여 있는 많은 무리들에게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치시던 중이었습니다. 길가에, 돌밭에, 가시떨기에,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을 비유로 말씀하신 후 예수님이 덧붙이신 한마디,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

저는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모태신앙인지라 아주 어릴 때부터 가정예배를 드렸고, 찬송가 맨 앞장에 엄마가 적어준 기도목록을 따라 읽으며 국가와 교회, 가정을 위해 기도하면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들을 귀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설교를 듣고 크게 은혜를 받거나 깨달아 실천하는 일은 크도록 없었지요. 그저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들리지 않는 설교에 그다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뭔가 이게 아닌데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집중해서 설교를 들었는데도 예배가 끝난 후 심령에 남는 게 없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났고요. 가끔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처럼 초상집에서 실컷 울고 난 후 뒤돌아서 ‘누가 죽었지?’ 하는 조문객처럼요.

1998년 주일예배 때로 기억합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그날은 작정을 하고 설교 전 기도시간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설교를 잘 듣고 싶다고요. 들을 수 있는 귀를 달라고요. 그렇게 기도하는데 은은하게 백합 향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향기가 진해져서 오늘 강대상 꽃꽂이가 백합인가보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눈을 떴는데 강대상에 백합은 없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자 신기하게도 그 말씀 하나하나가 귀에 들렸고 집중이 되고 은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고, 회개를 하고, 통곡을 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 건 그날 이후부터였습니다.

바닷가에서 하신 비유에 대해 제자들이 묻자 예수님은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씨앗은 곧 말씀으로,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는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하나님이 주신 귀한 말씀의 씨앗은 번번이 길가에, 돌밭에, 가시떨기에 떨어지곤 합니다. 몸은 교회에 있고, 손은 박수를 치고, 입은 아멘을 외치고, 귀는 듣고 있으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지 못하는 예배.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들음은 이렇게나 중요하지요. 하지만 들음은 귀가 있다고 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이 고쳐주신 것은 육체적인 귀머거리만이 아니지요. 귀가 있으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영적인 귀머거리도 고쳐주십니다. 저처럼요. 단순히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져 결실을 얻길 소원합니다.

신은혜

dopal02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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