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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이 먼저다!

939호 · 2018-02-24
생명의 말씀

나에게는 결혼을 하자마자 큰 고비가 다가왔다. 목사님께 미국 신학대학원 유학을 설득하여 허락을 받았다. 석박사 과정을 하려면 10년은 족히 걸릴 텐데, 흔쾌히 허락하시고 축복기도도 해주셨다. 아내와 함께 유학 준비를 다 마치고, 출국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즈음에 춘계산상집회로 기도원에 계신 목사님께서 갑자기 전화를 주셨다. 기도원으로 두 사람 모두 당장 내려오라는 급 호출이었다.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유학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며 완강한 반대를 하신다. 여러 번 경험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번복하시는 그분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잔뜩 시험에 들어 예배도 들어가지 않고, 숙소에 홀로 남아 억울함과 원통함 속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일었다. ‘여기가 기도원인데, 나는 뭐하고 있는 건가? 이러면 안 되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모든 말씀들이 나를 향한 경고요, 친절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느꼈다. 강퍅했던 내 마음이 깨지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유학 아니면 안 된다는 고집을 내려놓게 하시니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 이것 빼고, 나머지를 다 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그리고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마음이 유연해졌고, 목사님이 지시하시는 사역지로 두 말 없이 순종하였고, 그로부터 이제까지 이르게 되었다.

예배는 나를, 번민하는 길목에서 또렷하게 가야할 길로 인도하시며 순종케 하시는 ‘살아있는 경험’이다! 막으시는 것도, 강행하시는 것도(행16:6~10)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갑작스럽고 이유 없는 행동에 반감이 생길 때가 많다. 그런데 이유가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순종하고 나서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된다. 하나님 제일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나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보다 ‘순종’을 먼저 한다! 길 찾는데 머리 싸매고 시간 낭비하지 말자(엡5:15~21)! 순종이 빠른 길이다. 왜냐하면 길은 하나님께서 훤히 보여주시니(시119:105) 말이다.

송직화 목사

jesus_allinall@daum.net

To Be Succeeded

믿음의 대로를 여는 삶

큰 아이가 첫 성탄절 찬양과 율동을 준비하던 때의 일이다. 평소에도 주일학교에 가기를 힘들어하던 터라 두 달여간 매주일 남아 연습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아이가 힘들어하니 더 크면 시키자고 얘기했다. 그러나 중도하차하면 마음이 너무 안 좋을 것 같았다. 마침내 두 달여의 시간이 흐르고 리허설이 있던 날, 대체로 씩씩한 다른 친구들과 달리 울면서 가는 아들을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는 말씀이 심령에 날아와 꽂혔다.

그리고 마침내 성탄절. 3부와 4부 두 차례 단에 오른 후 놀랍게도 아이의 얼굴은 해처럼 밝아져 있었다. 손잡고 껑충껑충 뛰어나오면서 하는 말이 “엄마, 오늘 정말 재밌게 놀았어.”였다. 당시 막 세 돌 지난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었겠지만 우리는 확신했다. 빛 되신 예수님께서 이 아이를 만나주셨음을. 바로 그 다음 주일부터는 아이를 주일학교에 보낼 때 더 이상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가 아빠 엄마보다 앞서서 제 발로 걸어 들어갔으니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환경이 힘들거나 응답이 내가 생각하는 때에 오지 않으면 불평, 원망하고 근심, 걱정함으로 내 영혼을 얼룩지게 하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결코 부정이 아니다. 다만 소망을 굳게 붙잡고 약속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끝내 이루는 것이다. 출애굽하고도 원망불평으로 일관하다 광야에서 멸절한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 말고, ‘풀무 불 가운데서 구해주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 외에는 절하지 않겠다던 다니엘의 세 친구가 되라는 것이다.

두려움, 고집, 선입견 같은 것은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파해야 할 하나님과 나 사이의 견고한 진이며, 믿음의 행보를 저해하는 요소다. 조급할 필요 없다. 주저앉아있지 말고 어린아이가 부모님 손잡고 한 발짝씩 떼듯 한 걸음 한 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걷는 그것이 믿음의 대로를 활짝 여는 지름길이다. 비록 더딜지라도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다 보면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때가 차매 내 삶에 정녕 응함을 목도할 것이다.

이국진

joyful_jina@hanmail.net

평신도 묵상노트

기독교적 인간관에 대하여

그가 무엇을 하느냐, 어느 집안 출신이냐, 그가 어떻게 생겼느냐는 상관없다. 단지 인간이면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구해야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여기 ‘거라사의 광인’ 이야기는 기독교의 이러한 인간관을 잘 드러내준다.

예수님은 모두가 버린 귀신 들린 사람 둘을 찾아가신다. 그 둘은 군대 귀신이 들려 너무나 사납고 광적이어서 통제가 불가능했었다. 마을 사람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나아질 희망이 없어 보일뿐만 아니라 나날이 광증이 심해져가는 그들을 보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들 속에 있는 귀신이 자신에게 덮칠까봐 무섭기도 하고, 마을에 피해를 입힐까봐 걱정이 되기도 하여 차라리 그들이 사라지거나 죽기만을 바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부모도 형제도 가족도 모두 등을 돌려 무덤가에서 밤낮으로 자신들의 몸을 상하게 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바쁜 일정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찾아가셨다. 수 천 명을 위해 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써도 부족할 판인데, 너무나 비효율적이게 모두에게 포기되고 잊힌 두 사람을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만나러 가셨다. 도와달라고 소리칠 힘도, 손을 내밀 힘도 없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셨다. 왜냐고? 예수님은 그들이 온전한 정신으로 강건하여져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크게 기여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하찮기만 하고 성가시고 근심거리였던 그들도 예수님 눈에는 아름답고 귀할 뿐이다.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구하기가 쉬울까? 예수님도 쉼을 마다하고 배를 타는 긴 여정을 선택해야했고, 목숨을 위협하는 풍랑도 이겨내야만 하셨다. 또한 돼지 2천 마리의 희생도 필요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수고로움과 희생은 두 사람의 온전해짐과 비교해볼 때 참으로 사소한 것이었다.

이렇듯 우리 기독교에 절망은 없다. 단지 수고와 희생이 더 필요한 사건과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거라사의 광인’들에게조차 무한 긍정과 희망을 가지고 먼저 다가가는 수고와 돼지 몇 천 마리를 희생시켰던 우리 예수님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박소향

신앙에세이

매일 내게 주어진 일

특권층의 갑질, 금수저와 흙수저, 상대적인 박탈감,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사회의 전반 분위기가 암울하다. 디모데후서 3장 말씀처럼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고 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삶과 사회에 대해 갖는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은 당연한 것 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런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휩쓸려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시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늘 바라보고 계시고, 나는 항상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처한 현실이 실낱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아 꿈꾸는 것마저 사치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마치 노예였던 요셉처럼, 죄수였던 요셉처럼….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잘 나가는데 나만 홀로 멈춰서있는 것 같을 수도 있다.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작은 불빛 같던 희망마저 사라진 채 함께 걱정해 줄, 같이 울어줄 사람도 없이 깜깜한 인생의 터널을 홀로 걷고 있던 요셉처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요셉을 늘 바라보고 계셨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 아래 바로 그 요셉의 비참했던 삶 또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다.

그 모진 13년의 세월을 견디고 결국 당대 최강국의 총리가 된 요셉이 해왔던 일은 단 한가지뿐이다.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성심을 다했던 것.

오늘날 우리들 삶에도 매일 주어지는 일들이 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말이다. 우리의 13년 후 삶이 여전한 불만과 걱정에 사로잡혀있을지 아니면 놀라우신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고 있을지는 오늘 내게 주어진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달려있지 않을까? 설령 별 볼일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라도, 과연 노예보다, 죄수보다도 그럴 만한 일이 있을까?

박찬영

cross3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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