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글씨 크기 보통16
878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인생은 내가 만드는 작품이다(신30:11~20)

878호 · 2016-12-24

학교 다닐 때 공작시간이란 게 있었습니다. 찰흙이나 나무로 사람모양도 만들고 동물형태도 만드는 시간이지요. 그 때 보면 어떤 친구는 정말 감탄이 나올 만한 멋진 작품을 만드는가 하면, 어떤 친구는 암만 봐도 뭘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엉망으로 만드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제 나이 70을 바라보며, 또 목회 32년을 지나며 ‘인생은 내가 만드는 작품’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작시간에 만드는 작품이야 내가 못 만들면 짝꿍이 대신 만들어줄 수도 있지만, 내 인생은 오롯이 내가 만드는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운명’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 그런데 운명(運命)이란 ‘돌 운, 운전할 운’

(運)과 ‘목숨 명’(命)으로 이뤄진 것으로, 내 삶을 내가 운전할 수 있고, 내가 돌릴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힘이나 정해진 삶의 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30:15) 라고 말씀하심으로,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못 박습니다. 어떻게요? 바로 마음과 입술을 지키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32년 목회를 하면서 저도 나름 여러 가지 통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된 삶을 사는 반면, 남을 저주하는 자는 결국 자기가 저주를 받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이는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10:11~1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의 평안을 빌어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가 빈 평안이 그 집에 임할 것이고, 만일 합당하지 않으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축복’ 대신에 ‘저주’를 넣어서 생각해보면 심각해집니다. 내가 저주를 할 때 저주를 받을만한 사람이면 받겠지만 혹시 아니라면 그 저주를 내가 받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섬뜩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왜 당신 삶이 그리 힘들었나 이제 알겠습니까? 그러니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저주의 말을 했다가 내게 되돌아오면 큰일 나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저주하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을 보십시오. 그 저주가 다윗에게 임했습니까? 아닙니다.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에게 임해 세 아들들과 함께 칼에 죽임을 당했고, 그 시신마저 베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음에도 살려주고 축복하고, 그의 아들까지 거둔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로 인정받으며 시온의 영광을 누리지 않았습니까? 아합이나 발라단, 하만과 헤롯의 결말을 보십시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

(시109:17~18).

작고하신 제 믿음의 어머니가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목사, 누군가 자네를 밟고 일어서려고 하면 그냥 밟혀주게나. 내가 밟혀서 그 사람이 산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는가. 설령 그 사람이 자네를 밟거든 비록 힘들어도 이 목사는 절대 나 살자고 다시 그 사람을 밟는 일일랑 하지 말게.” 당시 가깝게 지내던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살겠다고 그 일과 무관한 저를 모함하고 저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돌이켜 그를 축복했더니 그 축복이 제게 쏟아졌습니다. 저는 축복기도를 할 때도 흔들어 눌러 넘치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축복을 꾹꾹 눌러서 해줍니다. 기도 받는 사람이 받으면 그가 잘 돼서 좋고, 행여 그가 내 기도를 사람의 말로 듣고 그저 흘려버린다면 그것이 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축복과 저주는 입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말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잠18:20). 누구든 입술의 열매를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풀어드리면 저주를 하면 그 저주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고, 축복의 말을 하면 축복의 열매로 배가 부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가시나무를 뿌리면 가시나무가 나서 여기 찔리고 저기 찔리게 되나 사과나무를 심으면 여기저기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뿌리시겠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이것 아십니까? 하나님은 누가 우리를 저주할 때 같이 저주로 맞대응하지 않는 정도에 만족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저주하는 상대를 축복하기 원하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저주를 퍼붓는 자에게 똑같이 저주하지 않는 것도 칭찬 받을 만한데, 나를 핍박하고 헐뜯는 자와 맞장 뜨지 않는 것만도 잘했다 하실 것 같은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고 하십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12:17). 형들이 행한 악을 선으로 갚은 요셉처럼,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라던 스데반처럼, 일개 로마병정에 잡혀 십자가에서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라고 하신 우리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 하십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말에도

‘선한 끝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악을 선으로 이김으로 모든 이와 화평케 된 자가 받을 복이 분명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화병 날까봐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너는 용서하고 그를 축복해라. 원수는 내가 갚아줄게.” 정말이냐고요? 그렇다마다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 빚진 자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에 빚진 자이며, 그 분의 용서하심에 빚진 자입니다. 그러니 누군들 사랑하지 못하겠으며, 누군들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서는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빚을 독촉하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자에게 주님은 다시 빚을 물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나에게 욕을 합니까? 나를 저주합니까? 나를 사람취급 안 합니까? 무시합니까? 그래봐야 한 데나리온이나 되겠습니까? 내가 탕감 받은 일만 달란트를 생각하세요. 나를 용서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그를 축복하세요. 그리고 그가 주리거든 먹이고, 그가 헐벗었거든 입히세요. 그게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생사화복 중 생과 복을 취할 수 있는 길입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단물과 쓴물을 내겠습니까?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에서 저주가 나오면 되겠습니까? 이것은 마땅치 않은 일입니다(약3:10~11). 그러니 우리 모두 원수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됩시다. 할렐루야!리, 원수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됩시다. 할렐루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878호 다른 글

커버스토리
지혜의 말씀
Cartoon
붕우칼럼
세상을 보는 창
성경에서 배운다
객원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