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심정 안다
여보게!
목회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잘 나가는 실업인 이었네. 전혀 부족함이 없었지. 젊은 나이에 상당한 재력을 가진 나를 많은 이들의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고,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양 의기양양하며 살았다네.
그러나 주의 종 길을 가면서부터 내 삶은 180도 달라졌네. 적어도 사람의 관점에서는 말일세. 나는 들어갈 집이 없어서 비가 뚝뚝 떨어지는 온실 속에서도 지내고, 유치원 지하에서도 살았고, 또 사지가 마비되어 보기도 했고, 눈이 실명위기까지 간 적도 있었지.
버선목이면 뒤집어서 후련하게 속을 보여줄 텐데 그럴 수 없어서 억지 누명을 뒤집어쓰기도 했고, 말도 안 되는 모함도 받아봤지. 가정이 깨지는 아픔도 경험했고, 자식들이 속을 썩여 내 가슴이 숯검정이 되기도 했지. 협박도 받아보고, 핍박도 받아보고…. 오죽하면 내 입으로 지나온 목회여정을 눈 덮인 산야요, 물 없는 사막이라고 말했을까.
나는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과정을 주셨을까? 왜 이런 산전수전을 겪게 하셨을까 생각하고 기도해봤네. 내가 목이 터져라 전하고, 낙타무릎이 되도록 기도했는데 왜 나를 이런 처지로 몰아넣으시는지 말일세.
그런데 나는 성경을 읽다가 그 해답을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찾았다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나는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백분 이해되네. 왜?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지금은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재산이 되었기 때문이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내가 사도 바울처럼 비천함에도 처해보고, 풍부함에도 처해봤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아파봤기 때문에, 즉 다양한 경험을 했기에 같은 처지에 놓인 성도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거야.
입에 발린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뼛속까지 이해하고, 그들을 인도할 수 있다는 거지. 그것이 일체의 비결이라는 것을 내가 안 거야. 솔직히 경험하지 않고 이해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네. 내가 갈 곳이 없어봤으니까 집이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들 마음을 이해하겠더라고.
내가 아파보니까 아픈 자의 심정을 알아 내가 힘이 들어도 귀신 쫓아주는 일에 게으를 수 없겠더라고. 내가 자식 때문에 속을 썩여봤으니까 자식 때문에 우는 자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가 나오더라 이 말이지.
여보게!
옛말에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했네. 왜? 경험했기 때문에 아는 거지.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랄까? 같은 상처를 안은 사람들은 그 사정을 깊이 알고 이해한다는 거지.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네. 그런데 그 분이 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까? 그건 그 분 스스로 연약한 육신을 입어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네. 곧 체휼하시려고 그러신 거라네. 진정한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니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자네 요즘 조금 힘들다고 들었네. 그러나 너무 좌절하지 말게. 지금 또 하나의 경험을 하고 있는 거니까. 그 경험으로 훗날 남을 지도할 수 있고, 간증할 수 있고, 남을 깊이 이해하게 될 걸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