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써 힘써 하나님을 알라 (히2:14~16)
어느 날 농부가 산에서 알을 주웠습니다.
농부는 알을 가지고 와서는 마침 알을 품던 암탉이 먹이를 먹으러 간 사이에 알 틈에다 그 알을 넣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알들이 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알에서는 노란 병아리가 나왔지만, 하나만은 달랐습니다. 그러나 녀석도 암탉이 엄마고, 병아리가 형제인 줄 알고 그것들과 똑같이 닭장 안에서 주는 먹이를 먹으며 구구 거리며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독수리가 닭장 위 하늘로부터 날아왔습니다.
모든 닭들은 무서워서 숨는데 이 별난 녀석만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와 생김새가 너무 똑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뭐야? 나랑 똑같이 생겼잖아?’녀석은 하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러자 독수리 한 마리가 닭장 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녀석은 물었습니다. “내 모습이 당신과 똑같아서요. 나는 닭인데 왜 모습이 당신과 같은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닭장 위에 있던 독수리가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닭이 아니야. 넌 독수리야. 내 모습을 봐봐. 너랑 똑같지? 너는 나처럼 하늘을 날 수 있어. 우리는 하늘의 왕자란다.
너는 왜 거기에 있는 거니? 어서 닭장을 나와.” 녀석은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하늘의 왕자라고요? 하늘을 날 수 있다고요?” 녀석은 자신이 독수리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닭장 위로 독수리가 왔다 갔다 하자 걱정이 된 주인이 닭장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독수리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어서 나와. 어서 나와서 날개를 펴봐. 그러면 너도 나처럼 날 수 있어.” 녀석은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독수리가 재촉을 하자 닭장 밖으로 나가려 했습니다. 그것을 본 닭장 속에 있던 닭들이 말했습니다. “너 어딜 가? 너 나가면 독수리 밥이 되고 말 거야.” 녀석은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결단하고 닭장 밖으로 나왔습니다. 독수리가 말합니다. “날개를 펴고 날아봐. 너는 본시 하늘을 평정할 수 있는 독수리야.” 녀석은 날개를 펴고 날아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날개를 펴고 달려도 도무지 날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독수리가 계속 말합니다. “계속해봐. 날 수 있어, 넌 원래 날 수 있도록 창조되었어, 나를 봐봐. 너도 나랑 똑같은 독수리야. 계속해봐.” 녀석은 계속 날개를 펴고 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잠깐이지만 하늘을 날았습니다. 힘을 얻은 녀석은 계속 달렸습니다. 순간 날개에 힘이 붙어 녀석이 하늘을 날았습니다. “나는 닭이 아니라 독수리야! 나는 날 수 있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여자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모든 것을 체휼하셨습니다. 그분도 배고프고, 피곤함을 느끼셨고, 아픔도 느끼시고, 잠도 주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권능을 행하시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봐라. 내가 너희와 똑같은 성정을 가졌지 않니? 너희와 같은 모습을 한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닮았듯이, 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너희도 하나님 아버지를 닮았단다. 그러므로 내게 있는 능력이 네게도 있단다. 내가 가진 권능이 네게도 있단다. 그러므로 내가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고, 나보다 더 큰일도 할 수 있단다(요14:12).”
아담의 후예인 우리는 원죄로 인해 마귀의 쇠사슬에 매였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했고, 부활하심으로 마귀를 이기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마귀의 종이 아닙니다. 닭장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서 닭장을 나와서 날아보아라. 날개를 펴라.” 곧 “너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알고 너무 놀랐습니다. 왜 안 놀랐겠습니까? 제가 평생 닭장 속에서나 살아야 하는 닭 인줄 알았는데, 하늘의 왕자 독수리라니 안 놀래겠습니까? 그래서 날아보았더니 날아지더라고요.
능력이 제게 있고, 권능이 제게 있더란 말입니다. 제 신분을 파악한 저는 세상 것들을 다 버리고 주의 종이 되어, 오직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 세계를 다니며 많은 영혼들에게 그들의 신분이 무엇인지,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신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면 그 분의 자녀된 당신이 어떤 사람이란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삼라만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분이 당신의 아들인 예수를 인간의 형상을 입혀 인자(人子)로 보내신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고 우리의 신분을 파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가난하고, 병들고, 가련한 존재로 사는 것은 우리에게 열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의지도 뜨뜻미지근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의 말씀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6~17).
닭장 속에서 나온 녀석이 처음부터 날았던 것은 아닙니다. 기필코 날고자 하여 하염없이 날갯짓을 했을 때 녀석은 날 수 있었습니다. ‘기필코 응답받고야 말겠다.’, ‘기필코 병에서 고침을 받고야 말겠다.’, ‘기필코 복을 받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누가복음 18장에 재판관을 찾아가 기어이 응답을 받고만 과부처럼, 마태복음 9장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는 믿음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장 안 된다고 돌아설 것이 아니라, 안 될 것 같다고 미리 포기할 것이 아니라,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친구처럼, 지붕을 뚫어서라도 목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응답은 소망의 열도에 정비례합니다.
우리 성도가 산에서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그러더랍니다. 성도들이 응답이 늦어지는 이유는 소망의 열도가 낮아서라고요, 응답을 받고야 말겠다는 마음, 부자가 되고야 말겠다는 소망, 성공하고야 말리라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도 100도가 되어야 끓고, 밥도 끓어야 설지 않습니다. 하물며 응답이야 말하나마나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얻을 때까지 구하고, 찾을 때까지 찾고, 열릴 때까지 두드리겠다는 열정, 열망,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을 못 받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련한 자로 사는 이유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망하지 않은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스마트폰이 아주 좋습니다. 별별 기능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기능을 익히지 않는다면 스마트폰이 무슨 소용입니까? ‘알고야 말겠다.’ 할 때 스마트폰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저더러 힘들게 굳이 스마트폰 기능을 배우려고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비행기 타고 가면서 36시간이나 배웠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도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제비도 입을 쩍쩍 벌리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 않습니까?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8).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리시며, 우주만물의 창조주요,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자녀된 우리에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고, 무궁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계발해야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고, 힘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New Start는 나의 신분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할렐루야!
물도 100도가 되어야 끓듯
응답은 소망의 열도에 정비례한다
열망과 간절함이 있을 때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