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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믿음으로 사는 한 해가 되자 (요14:8~17)

462호 · 2009-01-04

작년, 마지막 주에 우리는 한 해를 결산하는 영상을 봤습니다. 2008년 동안 우리 교단과 함께 하신 성령의 역사를 총괄한 영상이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 영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 교단을 통하여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에 무한 감사한다고도 했습니다. 반면, 그것을 왜 보여주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초석 목사를 자랑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이 영상을 보여드리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 영상을 보여드리는 까닭은 이것입니다. 첫째는 우리 교단에 역사하신 성령을 드러내기 위함이고, 둘째는 여러분의 기도와 물질로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고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며.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요, 예수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행해진 일들을 보고 예수를 믿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영상을 보여드린 것입니다.

2009년 새해입니다. 그러나 새해라고 무작정 좋아하기에는 현실은 너무 암울합니다. 세계 경제공황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조차 휘청거리고 있는 상황이니 결코 문제가 작다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현실이 난감하고, 인생의 짐이 무겁고 버겁지요. 이때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필요로 하는 시기입니다.

“주님, 우리 기업이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회사에서 나가래요. 살아갈 방법이 있을까요?”, “물건이 안 팔려요. 장사가 잘 될 수 있을까요?” 이럴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즉 ‘물론 가능하다. 그런데 먼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나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전류와 (-)전류가 만나야 전기가 발생된다는 말과 동일한 겁니다. 우리의 믿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합해져야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영상을 통하여 보셨겠지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소경이 눈을 뜨는 경우가 언제입니까? 제가 더 세게 귀신을 쫓을 때 낫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믿을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가 동일하게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도 어떤 사람은 낫지 않습니다. 왜요? 안 믿기 때문입니다. 못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지만 혈루증 걸린 여인만 나은 이유와 동일합니다.

부모 없이 오라버니만을 의지하던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그 오라버니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 그 집에 당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텐데, 왜 이리 늦게 오셨습니까?” 하며 안타까움을 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뭐라고 했습니까?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동문서답입니다. 왜요? ‘네 오라비가 다시 산다’는 예수님 말씀이 안 믿어지니까요. 못 믿은 겁니다. 거기에 주님은 역사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늘 예수님 말씀을 듣는데 열심이었던 마리아니 좀 다르겠지 하셨을까요? 그런데 마리아 역시 예수님이 늦게 당도하신 것만 억울해서 통곡했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따라 나온 유대인들도 덩달아 통곡했습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산다는 것을 아셨는데 말입니다.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산다’고 말씀해도 도무지 믿지 않는 불신앙에 가슴을 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에도 주님은 불신앙의 예루살렘을 두고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믿지 못하는 것 이상 비극이 있겠습니까? 제자가 스승을 믿지 못하는 것보다 슬픈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무덤에 가까이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또 대꾸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지났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여전한 불신앙입니다. 원래 순종에는 말이 필요 없지요. ‘예’면 되거든요. 그러자 주님이 통분하셔서 꾸지람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네 오라비가 살아나기를 원하면 내 말에 순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제야 그들이 돌을 옮겨 놓으니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불러 나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죽은 채로 냄새나는 까닭은 그 일을 해결하러 주님이 늦게 달려오신 것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불순종 때문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이 ‘돌을 옮겨놓으라’ 하시면 옮기면 됩니다. 주님이 ‘기도하라’ 하면 기도하면 됩니다. “주님, 기도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이게 얽히고설켜서 매우 복잡합니다.” 마르다처럼 대꾸하면 절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라.’ 하면 그냥 귀신을 쫓으면 됩니다. “아이고, 주님. 그런다고 되면 좋게요? 암 말기라 의사도 손을 놓은 판에 귀신 쫓는다고 됩니까?” 하면, 별 수 없이 일 당해야죠. 돌을 옮겨놓는 일은 절대 주님 몫이 아닙니다. 순종,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영상에서 보셔서 알겠지만, 제가 뭐 다른 거 합니까? 돌을 옮겨놓는 거 하는 겁니다. 그냥 주님이 하라는 대로 ‘예’ 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살리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돌을 옮겨놓는 작업을 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주님이 다 하시거든요. ‘나사로야 나와라’ 하시는 것은 주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가나의 혼인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종들에게 명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 분의 말씀에 순종하라.’ 이것이었습니다. 순종했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으십니까? 내 기업에, 내 교회와 내 나라에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십니까? 믿고 순종하세요. 그러면 죽은 가정이, 기업이, 교회와 나라가 살아날 것이며, 부족한 내 삶에 더 좋은 것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믿고 싶어도 안 믿어지십니까? 계속 의심이 생깁니까? 그런 사람들 때문에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보고라도 믿으라고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 듣고는 제자들을 보내어 주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주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마11:4).

제가 국내외 집회를 다니면서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이를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 되시며, 그 예수 이름의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보고 믿으라 이것입니다. 신앙의 기본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행함이 따라오고,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009년, 다들 힘들다고 합니다. 이는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격이고, 의지할 곳 없는 자매에게 오라비가 죽은 격입니다.

그러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고, 죽은 오라비가 무덤에서 살아났습니다. 언제요? 어떻게요? 믿고 순종할 때입니다. 당신이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 남들이 다 힘들어도 당신은 신나는 한 해가 될 수 있고, 남들이 다 부족하고 없다할 때 당신은 넘칠 수 있고, 남들이 다 죽겠다고 할 때도 당신은 살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능히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이 무르익어야

결혼에 골인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고

기도는 넘지 못할 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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