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으뜸 됨이 왜 일까? ( 아 5:1~16 )
우리 아들에게 “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아마 백 퍼센트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우리 아버지는 여기를 찔러도, 저기를 찔러도 예수밖에 안 나오는 분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여기를 찔러도, 저기를 찔러도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백가지 질문을 해도 예수고, 천문(千問) 천답(千答)이 다 예수입니다. 왜 그러느냐고요? 영 죽을 나를 살리신 분, 나를 위해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더러운 말 밥그릇에 몸을 누이신 분, 그리고 이 땅에서 모진 핍박과 모함을 뒤집어쓰고 날 위해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분, 그 분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보잘 것 없는 나를 당신의 종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능력을 입혀 일하게 하시고, 시시때때로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한없이 베풀어주시는 분, 또 장차 나를 영원한 나라로 데려가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일진대 제가 예수 외에 누구를 더 알기 원하겠으며, 예수 외에 무엇을 더 원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누가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게 떼어놓는단 말입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사랑하는 주님이 남이 사랑하는 어느 누구보다 더 나음은, 남이 사랑하는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음은 눈이 멀어서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실제적으로 그 분이 모든 것의 으뜸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누구의 신(神)이 참신인지 대결합니다. 먼저 바알의 선지자 450명이 그들의 신을 부르지만 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하나님을 부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왕상18:36).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이 불을 내려 엘리야가 쌓아놓은 단의 제물을 태우셨습니다. 이것을 본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경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군의 주 되시며, 우리를 구원하실 분입니다. 그러니 그 분과 누구를 비기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야의 고백처럼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 특심을 내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과 결혼한 후의 일입니다. 솔로몬이 그녀의 문을 두드리지만 그녀가 너무 망설이다 문을 늦게 열자 왕은 그냥 가버립니다. 늦게 문을 연 술람미 여인이 왕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이스라엘 처녀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술람미 여인에게 묻습니다.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아5:9). 그 때 술람미 여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아5:10~16).
술람미 여인은 오직 솔로몬 왕만을 그리워했고, 솔로몬 왕만을 사모했습니다. 그를 찾아 나선 길에 다치기도 하고, 옷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만을 찾았습니다. 왜요? 술람미 여인의 고백처럼 그는 왕이며, 장엄한 분이며, 어느 누구와도 비길 수 없이 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술람미 여인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존귀하신 분이며, 권능자이시며, 생명의 원천이 되시며, 신성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분과 대체할 아무 것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왜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는 상황 앞에서도 느브갓네살 왕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까? 왜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던져지면서까지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이 세운 왕보다, 그들이 만든 금신상보다 더 나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단3:17).
그들은 하나님이 풀무불에서 넉넉히 건져내실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진 후 찾아간 느브갓네살 왕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단6:20). 당연하지요. 하나님은 사자굴에서 다니엘을 지키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단6:22). 그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을 따라 사는 길에 고난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찾아 헤맬 때 상처를 입고 옷을 빼앗긴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그 분을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분이 우리에게 베푼 사랑과 은혜 때문이며, 그 분의 주권과 능력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후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사나 죽으나 예수’만을 외친 이유가 그것 아닙니까? 제가 온갖 모함과 핍박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분을 따르는 것은 그 분을 바로 알기 때문입니다.
일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다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문을 받고 결국 옥사한 주기철 목사님이 어떻게 모진 고문을 이겨냈습니까? 하나님을 바로 알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제대로 알면 절대 그 분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 분을 바로 알면 절대 그 분과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핍박과 모함보다 더 힘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혈연을 끊는 일일 겁니다. 제가 예수를 알고는 3년 넘게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예순가 야순가에게 미친놈은 필요 없다.” 하시며 집에서 저를 내쫓으실 때, 만일 제가 미친 것이 세상 명예나 돈이었다면 바로 포기했을 겁니다. 부모님이 그것보다 우선이었고, 귀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찢어지는 가슴을 달래며 어머니에게 등을 돌렸던 것은,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와도 바꿀 수 없는 분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능자 예수, 구원자 예수,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나를 신천지로 데려가실 예수였기에 타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험 중에 있습니까? 고난 중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받은 시험과 고난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받는 이것이 대수겠습니까? 수치와 멸시를 받았습니까? 나를 위해 벌거벗고 십자가에 오른 예수를 생각한다면 이까짓 수치와 멸시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유혹이 옵니까? 주님이 그 날 주실 상과 면류관을 생각하면 유혹을 뿌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남들이 자랑하고 뽐내는 것에 비교할 수 없이 귀한 분이며,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창조주요, 전능자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그런 분을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그런 분을 두고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그러니 다른 곳에 눈길 보내지 말고, 그 분 사랑 안에 거합시다. 그 분이 문을 두드리실 때 얼른 문을 열고 그 분은 맞아들입시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그 분 한 분이면 족합니다. 그 안에 영생이 있고, 구원이 있으며, 그 분 안에 사랑과 평화가 있고, 부귀와 장수와 지혜가 있습니다. 그 분 안에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으로 만족합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할렐루야!
사랑은 실천이다
당신은 주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
‘때문에’ 사랑이냐?
‘불구하고’의 사랑이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