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목표가 분명한 자는 피곤치 않다 ( 빌 3:12~14 )
남편과 사별하고 세 딸과 함께 사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인 혼자의 힘으로 아이 셋을 키우며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지라 밤낮을 뛰어 봐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가장 안타까운 일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자기 아이들이 기가 죽고 주눅 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처럼 다 해줄 수도 없는 형편인지라 여인은 늘 애가 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세 딸을 불렀습니다.
“얘들아, 엄마는 너희 맘을 잘 안단다. 너희도 다른 애들처럼 좋은 옷도 입고 싶고, 좋은 집에 살고 싶고, 좋은 곳에 놀러 가고도 싶겠지. 그러나 우리 조금만 참자. 여기 저금통장이 있다. 지금 조금 참고 여기에 저금을 하는 거야. 그러면 너희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이면 우리도 좋은 집에 좋은 옷 입고 살 수 있게 된단다. 그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겠니? 우리가 지금 못 누리는 게 아니라 안 누리는 것이니 기죽지 말고 살아라.”
여인은 아이들에게 저금통장을 보이며 ‘파이팅’을 외쳤습니다.
아이들도 그동안 눌렸던 심기가 회복됐는지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말대로 기죽지 않고 활달하게 잘 자라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 딸이 어느 날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이제 우리 좋은 집에 이사 갈 때가 되었지요? 엄마가 약속하셨잖아요. 통장에 돈은 얼마나 있어요?”
그러자 엄마는 세 딸 앞에 저금통장을 내보였습니다. 거기에는 한 푼의 돈도 없었습니다.
“잘 들어라. 엄마 혼자서 벌어야 얼마나 벌었겠니? 그 돈으로 다 너희들 뒷바라지 한 거란다.
엄마는 너희가 아빠 없다고 기죽을까봐, 남들한테 주눅 들어 살까봐 그런 거야. 엄마의 저금통장은 바로 너희들이야. 너희가 다 취직을 했으니 함께 돈을 벌게 되면 곧 좋은 집에 살 수 있을 거야.”
아이들은 엄마를 안고 흐느껴 울었고, 서로 힘을 합쳐 3년 만에 큰 집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의 목적은 아이들의 기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이 여인의 목표는 좋은 집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목적을 이루려고 목표를 정했고, 목적을 이룸으로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 세계 목회자 영성 세미나의 첫 시간에 참가자에게 “목적을 정하라.”고 외쳤습니다. 목적이 없는 인생은 부평초와 같고, 표류하는 배와 같아 이미 실패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달리기를 잘 하는 사람이라도 방향 없이 이리저리 달린다면 어떻게 골인한단 말입니까? 아무리 활을 잘 쏘는 사람일지라도 과녁이 없다면 어떻게 관통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사도 바울의 목적은 모든 영혼을 구원함에 있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9:19~23).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4).
그의 목표는 그 날의 상을 받는 것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니 그에 상응하여 목표에도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과 목표를 볼까요? 그 분의 목적은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고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그의 목표는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 부여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목적한 바를 이루셨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권세가 아들이신 예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절대적인 권세를 갖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목적을 이루어 목표를 달성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목적과 목표는 상호연관 된 것이며, 목적이 궁극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사명과 동격이라면 목표는 개인적인 차원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목적이 없이 목표에 이를 수 없고, 목표가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영어 통역을 해주는 임 박사가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의 목적과 목표는 무엇입니까?”
저는 “내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부활했다는 소식을 지구촌에 전하는 것이고, 내 목표는 그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불리며, 열 고을의 왕권을 갖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세계 목회자 영성 세미나도 주최하는 것이고, 매달 해외집회도 갖는 것이다.”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그렇군요. 저도 이제부터 확실한 목적과 목표를 정해놓고 살겠습니다. 그래야 어떠한 환경이나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라고 하더군요.
사실 이런 목적과 목표가 없다면 저는 벌써 쓰러졌을 것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할 나이에 한 달 간격으로 해외집회를 갖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한 목적과 목표가 있기에 피곤을 이기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야곱의 목적은 꿈에도 그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그의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했던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의식과 목표가 그를 악조건 속에도 버티게 해 준 것이고, 그에게서 초능력이 나오게 한 것입니다.
태릉선수촌의 국가 대표선수들이 그 힘든 훈련을 감수할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 역시 목적과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국위선양이며, 목표는 금메달을 따서 여생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땀이 비 오듯 하는 강훈련에도, 감독의 불호령에도 이탈하지 않고 버티는 것입니다.
목적을 이루면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이요,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적에 이르려면 뒤엣것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목적을 향하여 질주하려고 할 때 꼭 발목을 붙잡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입니다. 바울이 만일 과거를 안고 뛰었다면 사도로서 설 수 없었을 것이고, 베드로가 과거의 노예가 되었더라면 수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과거에 잡혀 있었다면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 진군하지 못할 것입니다.
목적과 목표에 이르는데 장애되는 과거는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대단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실패더미였다고 해도 다 잊어야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목적도 없고 목표도 없다면 무엇을 향해 어디로 나갈 겁니까? 어떻게 기도할 겁니까? 만일 제 아들이 자동차를 사달라고 한다면 제가 물을 것 아닙니까? “자동차가 왜 필요하며, 어떤 자동차를 사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럴 때 “그냥요.” 한다면 저는 절대로 자동차를 사주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세우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인생을 피곤지 않게 할 것이며, 포기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할렐루야!
거룩한 파괴는
거룩한 건설을 낳는다
내일의 태양도
너를 위해 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