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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마귀의 방해를 두려워하지 마라 ( 엡6:10~20 )

361호 · 2007-01-24

제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고 나서 곧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저는 평신도 시절 하루에 7시간씩 기도하고 오직 말씀을 상고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렸고, 병든 사람이 있으면 어디든 찾아가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데요. 그 때 제게 딴죽을 건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바로 제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셨습니다. 제가 물질의 여유가 있어 교회 행사 여기저기에 참여하면 목사님이 “원규 아버지, 이제 그만 하시죠.”라고 했고, 제가 하나님 말씀을 받고는 기뻐서 단걸음에 목사님께 달려갔더니 목사님의 첫 말씀이 “여기 또 성경 한 권 나오겠구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장이 예수 믿게 해 주십시오”라고 그렇게 기도하시던 우리 목사님이, 제가 능력을 받아 일하면 가장 기뻐하실 줄 알았던 우리 목사님이 전혀 예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 때 제가 얼마나 좌절했는지 아십니까? 맥이 딱 풀리고 정말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그 때는 믿음의 연륜이 짧아 그것이 당연히 있는 자연스러운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성경을 보니 하나님의 일에는 늘 저항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가장 믿었던 사람을 통해서 말입니다.

엘가나라 하는 남편에게 브닌나와 한나, 두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고, 한나는 무자했습니다. 한나는 브닌가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습니다. “나도 브닌나처럼 자녀가 있었으면…” 게다가 브닌나가 한나를 더욱 격동케 하니 한나는 늘 번민 했고, 마침내 “나도 자녀를 갖고야 말리라.”라고 결단합니다.

그 때 한나의 목표를 흐리게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한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남편 엘가나였습니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삼상1:8). 이것은 분명히 엘가나의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나의 결단을 무너뜨리기에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한나가 거기서 “그래, 자식이 무슨 소용이람. 날 저토록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는데…” 하고 편안했더라면 사무엘은 이 세상에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출애굽을 하려할 때 그를 막은 것은 바로였습니다. 한 때 모세와 혈육처럼 지냈던 그 바로 말입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얻기 위해 엘리야를 좇을 때 엘리사에게 제동을 건 것은 같은 생도들이었습니다.

자동차가 달리면 저항이 있듯, 우리가 계획하고 일을 시도하려고 하면 막는 세력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더욱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의 삶을 영적 전투라고 부르는 겁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5,36).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전투가 아니라 영적 전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전신갑주가 무엇입니까? 이는 완전무장을 나타내는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조금의 틈새가 없어야 악한 자들의 불화살에도 공격당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가족이 마귀냐? 내 가까운 사람들이 원수냐?”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들이 마귀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마귀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깨어 있지 못하면 나도 다른 사람이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에 방해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킨 자를 찾나니”(벧전5:8).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히시고 앞으로 당할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곡하게 이를 만류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악한 마귀가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못하도록 미혹했기 때문에 주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니엘이 처음으로 자기 백성들의 미래에 관한 일을 깨닫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고 슬퍼하며 겸손히 기도한 첫 날에 하나님은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사국군이 이를 막았습니다. 바사국군이라 함은 바사 곧 페르시아 제국의 수호신들에 해당하는 악령들의 세력을 말하는 것으로, 한 마디로 마귀 세력입니다. 그들이 막아 21일 동안 지체되었는데,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 미가엘이 도와 응답이 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추진하려고 하면 먼저 악한 것들이 알고 이를 막습니다. 그것이 구역식구가 될 수도 있고, 목사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론 경험을 앞세운 내 자신이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주저앉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사무엘 같은 아들을, 엘리사 같은 영감을, 모세처럼 출애굽의 대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주님을 불렀을 때 주님의 제자들이 바디매오를 저지시켰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주님을 불러 평생 소원이던 눈을 떴던 것입니다.

악한 것들은 어떻게든 우리를 막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허깨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사 악한 것들을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이 호랑이입니다. 그냥 호랑이처럼 소리만 내는 것이니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미 어두움의 권세에서 우리를 꺼내셨기에 우리는 그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救贖)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

이미 우리는 빛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어둡느냐 하면 스위치를 넣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전기시설이 완비되어 있어도 스위치를 올리지 않으면 불이 들어오지 않듯, 주님이 우리를 빛의 나라에 들여놓으셨는데도 스스로 커튼을 치고, 스위치를 넣지 않기 때문에 어두운 데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후에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6:18).

우리는 올해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한 해가 되자’는 목표를 잡았습니다. 이미 하나님도 우리의 마음을 아셨고, 또한 악한 것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이 쉽게 이루어질 리가 있습니까? 악한 마귀는 바랄 수 없는 일들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그냥 눈 감고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보다 더욱 기도를 해야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저항보다 비행기에 받는 저항이 더욱 큽니다. 당신에게 저항이 크게 오는 것은 더 큰 축복이 있다는 증거니, 저항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로 뛰어넘읍시다. 저항보다 크신 하나님만을 바라봅시다. 할렐루야!

개가 짖는다고 기차가 멈출쏘냐

먹구름을 두려워 하고야 어찌 단비를 바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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