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자 하나님이 이렇게 스스로를 설명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요, 우리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십니다. 그 분은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시며, 만세의 주가 되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만군의 주요, 전능하시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며, 크고 능하신 창조자시요, 그리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긍휼하심은 만민을 구원하셨으며, 그 분의 진실하심이 우리의 약속이 되셨으며, 그 분의 공의로우심이 그의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신(神)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하신 전능자이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세상의 다른 신들과 동일했더라면 저는 절대 하나님의 종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성도의 반열도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그의 사랑과 그의 능력이 저로 하여금 스스로 그에게 사슬로 얽매게 했던 것입니다.
저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좇을 만큼 그 분은 광대하셨고, 오묘막측하셨으며, 자비로우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을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며, 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관심 안에 들기 위해 몸부림치는 까닭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 안에 들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삶이 주어지며, 죽음이 없는 영생복락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것, 그 분의 사랑을 입고 인정을 받는 것은 남들과 같아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믿음의 선친들은 남들이 할 수 없는 순종과 헌신, 그리고 순교자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철저한 순종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를 친구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의 여정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불변했습니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고 칭하시고, 그의 계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또한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를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그것이 그가 가진 전 재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헌금을 드리는 것보다 있는 전부를 드린 과부의 믿음을 크게 보셨던 것입니다.
또한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것은 재산을 내어 놓는 의미를 넘어 일생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바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이 가는 곳마다 그의 이름 이름도 함께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러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만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의 사력을 다한 믿음이 예수의 관심을 끌었고 그를 살렸던 것입니다. 이들 모두 남들이 드릴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드린 자들입니다. 억지로나 인색함 없이 감사와 기쁨으로 드린 자들로 다른 이와 분명히 구별됩니다. 세상의 성공도 범상한 것에는 없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일도 역시 남들과는 다른 헌신에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이나 야고보, 베드로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들의 목숨을 바친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순교자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믿음이 죽음 앞에서도 그를 지탱시켰던 것입니다.
우리 교단은 다른 교회가 추종할 수 없는 믿음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성도적 신앙의 단계가 아니라 사도적 권능을 소유한 믿음의 역군들이 되도록 훈련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것 때문에 불평하고 교회를 떠나는 자들이 있기도 하지만 저는 그 날을 압니다. 그 날에는 분명히 희비가 엇갈릴 것입니다. 남들과 똑같이 가면 일등을 못합니다. 남들보다 유난스러워야 하고, 남들보다 열심을 내야 앞설 수 있습니다. 모두 면류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예수와 한 자리에 앉아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모든 이에게 넓게 열렸으나 하늘의 상은 특별한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들이 다 가는 길이라면 이 자리를 거부하겠습니다. 남들처럼 안일하고 편안한 목회길이라면 차라리 다른 길을 택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한민국 이단의 괴수라는 소리를 듣고도 이 길을 가는 것은 우리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예수는 반드시 오십니다. 그리고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저는 2등은 싫습니다. 하나님께 유일한 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자로 인식되고 싶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저와 같은 상을 받기를 소망하기에 더 좁은 길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상사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뭔가 특출나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 남들이 하지 않는 기발한 선물을 장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생각마세요. 하나님은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남들과 달라야 합니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의 눈에 띄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울러 다른 사람의 시선과 시기질투를 같이 받게 됩니다. 유별나게 군다는 둥, 유난을 떤다는 둥 많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개가 짖는다고 기차가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대강 대강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분명히 계시록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고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으십니까? 남들이 드리지 못한 믿음을 드리세요. 아무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예수의 칭찬을 들은 백부장처럼 소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십니까? 남들이 드리지 않는 물질을 드리세요.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남은 기름과 가루를 엘리야에게 드린 것처럼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풍성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사나 죽으나 오직 주를 위해 살아 보세요. 사도 바울의 신앙을 따라 핍박과 모함을 이겨내면 반드시 그 날에 왕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남들이 다들 가는 넓은 신앙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좁은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저는 남들이 다 가는 길은 가지 않겠습니다. 핍박과 환난이 온다 해도 좁은 길을 자청하여 가겠습니다. 좁은 길이 오히려 편안한 길입니다. 나와의 싸움만이 있을 뿐이니까요. 예수는 곧 오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동안의 안일함에 취하여 나태하다가 주님이 오시면 뭐라고 하실 것입니까? 주님이 손을 내밀 때 무엇을 드릴 것입니까? 내일을 준비하는 자,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자입니다.
모두가 좁은 길로 가는 것이었다면 나는 좁은 길로 가지 않았으리라
차갑든지 뜨겁든지 하라 미지근하면 토해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