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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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포기는 자살이다

1375호 · 2026-09-13

“포기는 자살 행위다.”

총회장 목사님께서 늘 강단에서 온 힘을 다해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외침을 마주할 때마다 고(故) 정주영 회장의 저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 나오는 버드나무 개구리 일화가 깊이 떠오릅니다.

젊은 시절, 숱한 사업 실패를 겪고 고향으로 돌아와 힘겹게 농사 일을 하던 정 회장은 비 내리는 논둑 곁에 지쳐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빗물에 미끄러져 떨어지면서도 버드나무 잎을 향해 쉼 없이 뛰어오르는 작은 개구리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빗줄기는 그치지 않았고 환경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개구리는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서른 번이 넘는 도약 끝에 나뭇가지 위로 올라섰습니다. 저 미물조차 포기하지 않고 끝내 뜻을 이루는데, 하물며 인간이 주저앉을 수 있겠느냐는 그 불굴의 깨달음은 훗날 숱한 불가능을 기적으로 바꾼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마주한 현실 역시 녹록지 않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부흥의 시대는 끝났다며 발걸음을 멈추려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후퇴란 없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기도와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우리 믿음의 행보는 이미 기적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불굴의 기도로 물꼬를 튼 대구와 전주, 그리고 소수의 성도들이 온몸과 온 마음으로 매달려 3천 명이 모이는 거룩한 축제를 일궈낸 군산 집회의 감격은 여전히 우리 심장을 뛰게 합니다. 4일 배방, 아산, 천안 세 지역 교회가 한뜻으로 연합해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한 모습 역시, 복음은 시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돌파하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지금은 주저앉을 때가 아니라 다시 일어나 빛을 발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나은 환경이 아니라,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믿음과 기도입니다. 내가 딛고 선 그 척박한 땅부터 기름지게 일구어 나갑시다.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한 영혼을 향한 간절한 도약이 마침내 이 땅에 거대한 부흥의 파도를 일으킬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이현승 목사
빛과 소금

주님이 원하시는 것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17:11).

얼마 전 성경을 읽다가 이 말씀이 마음 깊이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하나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는 사실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먼저 헤아리기보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필요와 계획, 내가 원하는 것이 삶의 우선순위에 놓여 있지는 않았을까.

나에게는 세 살 터울의 두 아이가 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도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싶을 만큼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참 다르다. 그래서 매일 티격태격하다가도 신나게 놀고 웃다가 울다가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가 가장 미소 짓고 감동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서로를 챙겨주고 사랑해주며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볼 때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조금씩 양보하고 하나 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어린아이와 대화를 나누려면 내가 몸을 숙여 자세를 낮춰야 아이와 눈높이가 맞는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나와 다른 사람이 하나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나에게 맞춰주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먼저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완벽하지 않다. 저마다 부족한 부분이 있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서로를 향한 판단보다 긍휼이 필요하고, 내 생각을 주장하기보다 한 걸음 물러서서 이해하고 용납하려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물론 쉽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에, 거창한 것부터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보고 싶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겠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끊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맺어진 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 예수님께서 드리셨던 간절한 기도가 우리 삶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송지혜 집사
청춘, 그 아름다운 이름

그까짓 체면이 뭐라고

피부가 썩어 문드러지는 나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어 병을 고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에 관한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어요. 지금 죽느냐 사느냐가 달렸는데 발가벗고 요단강에 들어가는 게 뭐가 대수랴. 나라면 곧장 들어가지.

나아만은 강대국 아람의 군대를 지휘해 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유능한 장군이었고, 왕에게 크고 존귀한 자로 여김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능력도, 권력도, 명예도, 재력도 모두 가진 그가 나병에 걸린 겁니다. 돈이나 권위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에 말이죠. 그는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가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를 가지고요. 오늘날 시세로 계산하면 150억 원입니다. 거액을 들고 엘리사 집 앞에 도착한 그가 받은 처방은 황당무계했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일곱 번 씻으라. 여러분이라면 요단강에 들어가시겠어요? 이래 봬도 내가 고위 장군인데, 나아만이 분노하여 그냥 떠나려 하자 그의 종들이 만류하며 아룁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다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왕하5:13). 깨달은 나아만이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씻었습니다. 그랬더니 괜찮아진 정도가 아니라 어린아이의 살처럼 되었습니다. 이전보다 더 좋아졌죠.

8월 첫째 주에 저는 기도원 산상집회에 갔습니다. 저녁 예배 때 멕시코에서 오신 엠마누엘 목사님이 설교하셨어요. 하루는 목사님이 본교회에서 찬양하는데 어떤 여자가 손을 번쩍 들고 소리치면서 강대상 앞에서부터 맨 뒷자리까지 뛰어갔다가 다시 앞으로 뛰어왔다가 다시 맨 뒷자리까지 뛰어갔다가 앞으로 뛰어오기를 다섯 번이나 반복하더랍니다. 누가 봐도 이상하고 남사스러운 행동이었죠. “성도님, 지금 뭐 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사람들 보라고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보라고 한 겁니다. 자녀가 다섯인데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기도한 거예요.” 지금은 그 기도대로 다섯 자녀가 모두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일곱 바퀴를 돌고 크게 소리 지르기. 남들이 보면 얼마나 황당무계합니까? 얼마나 남부끄러운가요. 그런데, 남의 시선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도원에서 이 설교를 하시며 엠마누엘 목사님이 선포하셨어요. 지금, 이 순간,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기뻐 소리치라고요. 그때 역사가 일어날 거라고요. 저에겐 하나님의 역사가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리에서 박수 치며 아멘만 외칠 뿐이었어요.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그렇지만 너무 창피하더군요. 엠마누엘 목사님이 다시 소리쳤습니다. 더 크게 더 크게 함성을 지르며 뛰라고요. 그 순간, 저는 손을 번쩍 들고 발을 떼어 좌에서 우로 뛰었습니다. 마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처럼 맨 뒷자리에서 맨 앞자리까지 뛰었습니다. 발개진 얼굴로 함성을 지르며 뛰었습니다. 성전을 뛰는 동안 저는 나아만 장군처럼 완전히 발가벗겨졌습니다. 대기업에 다닌다는 프라이드, 선후배에게 받는 인정과 존경, 견고한 자아와 나를 감싸고 있는 품위까지 전부 벗겨지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봤습니다. 온전히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가장 낮아지고 낮아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내 아버지 앞인데 그까짓 체면이 뭐라고요. 이런 자녀를 보신 하나님이 어찌 축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혜

참된 깨달음

낮아짐으로 나아가는 용기

용서에 관한 두 말씀 앞에 섰다. 하나는 용서하라는, 다른 하나는 용서를 구하라는 말씀이었다. 같은 용서지만 내게는 무게가 달랐다. 남을 용서하는 것보다 내가 낮아져 용서를 구하는 것이 더 무거웠다.

나는 한 선배에게 빚을 졌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선배가 나를 이해하고 용서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어있었다. 그러나 말씀은 내 체면을 내려놓게 했고, 빛 가운데로 나가게 했다. 잠언은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자복하는 자는 긍휼을 얻는다고 말한다(잠28:13).

내가 고백을 미룬 것은 죄책감보다 수치심 때문이었다. 죄책감은 ‘내가 잘못했다’ 말하지만, 수치심은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다’라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이 회개 대신 은폐를, 정직 대신 도피를 택하게 한다. 잠시 모른 체 하면 편해 보이지만, 그것은 회복이 아니라 지연된 안도감일 뿐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마18)를 묵상하며, 나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하나님께는 헤아릴 수 없이 큰 용서를 구하면서도, 정작 사람 앞에서는 작은 빚 하나 내려놓지 못했다. 탕감받은 은혜의 크기를 잊었기에, 용서하라는 말씀은 가볍게, 용서를 구하라는 말씀은 무겁게 느꼈던 것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진실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

하나님은 고백하는 자를 부끄러움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신다(요일1:9). 잘못을 자백하는 것은 깨끗함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회개는 무너지는 길이 아니라 은혜로 다시 세워지는 길이다.

숨김은 해결이 아니며, 침묵은 화목이 아니다. 부끄러움 때문에 물러서지 말고, 말씀 앞에서 나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여전히 두렵고 무겁지만, 내가 빚 앞에 정직하게 설 때 주님은 그 자리를 정죄로만 남겨두지 않으실 것을 믿는다. 그 끝에는 아버지의 품과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숨기기보다 자복하고, 미루기보다 바로 실천하며, 체면보다 화목을 택한다. 믿음의 용기로, 내가 상처 입힌 자리 앞에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서고자 한다.

양은정 전도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사르트르의 『닫힌 방』이라는 희곡에서 유래한 말로, 동명의 웹툰과 드라마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타인 자체가 나쁜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타인의 평가와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휘둘릴 때 타인과의 관계가 곧 나를 갉아먹는 지옥이 된다는 뜻입니다.

주변 사람을 의식하고 배려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남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할 때 생깁니다. 누군가의 시선이 없다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을, 누군가의 시선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올해 수련회 때 총회장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성경에서 기적을 맛본 인물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삭개오, 수로보니게 여인, 중풍병자의 친구 등등이요. 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에 오르는 장면은, 오늘날로 치면 정장을 입은 고위 공무원이 유명 인사를 보러 인파들 사이에서 담장 위로 올라간 모습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의식하며 타인의 시선을 신경 썼다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베다니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제자들 앞에서 값비싼 향유를 발에 붓고 머리로 닦습니다. 이는 당시 문화적 관습을 고려해도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한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에게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 다른 사람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예수님 한 분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 자유를 누릴 수 없지만,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 자유합니다. 다윗은 왕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람들 앞에서 아랫바지가 흘러내리든 말든 자유롭게 춤을 췄습니다.

저 역시 성경의 인물들을 생각하며,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해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제 본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지만, 체면을 내려놓고 조금씩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 땐,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깁니다. 사람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하나님만 온전히 경외할 때 성경의 인물들처럼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전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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