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보지 않아도
며칠 전 교회 출입구에서 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사이의 틈에 핀 노란 꽃을 보았다. 누가 보아도 꽃이 피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곳에 어떻게 꽃이 피었을까? 만약 꽃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이런 곳을 선택했을까? 비옥한 흙과 물이 있고 사람들이 감탄해주는 정원에서 피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꽃이 그 자리에 피어난 이유는 하나였다. 씨가 그곳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다고 말씀한다(행17:26). 홀로 피어난 꽃처럼 나도 우연히 여기 있는 것 같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나를 이곳에 두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1학년 첫 종강예배 말씀이 떠오른다. “새싹이 할 일은 살아남는 것이다.” 햇병아리지만 그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래, 일단 살아남아 보자.’ 그렇게 버티던 새싹이 어느덧 4학년이 되었다. 내가 그러했듯 이 꽃 역시 처음에는 살아남는 게 목적인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꽃이 해야 할 다음 일은 결국 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 단순한 목적을 이루기까지 꽃에게는 아무도 보지 못한 시간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렸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해 왔다.
아무도 몰라주어도, 누군가의 시선이 닿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리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여 꽃을 피워내는 것.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제 몫을 다한 작은 꽃 한 송이를 보며, 그것이 내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충성임을 배운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죽이시면서 살리신다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던 어느 유학생의 간증이다.
보험이 없는 상태로 미국 본토에서 자녀를 출산했더니, 수천만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의료비가 청구되었다. 그 병원비를 갚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조금씩 갚아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병원의 또 다른 부서에서 의료비가 청구되었다. 부서별로 따로 청구되는 미국 병원의 관례를 알게 되었고, 또다시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웬걸 또 세 번째로 병원비가 청구되어 경악하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유학 와서 공부는커녕 빚만 갚다가 끝나겠다 싶어서 말이다. 유학생의 빠듯한 경제 사정을 솔직히 말하며 갚을 능력이 없다는 솔직한 고백을 한 것이다. 병원 사회복지 담당자가 듣더니 몇 가지 서류들(통장 잔고증명서와 수입상황 내역 서류들) 을 요청했다. 그리고는 서류제출 한 달 뒤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단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파산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턴 주정부에서 당신의 병원비를 갚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이 유학생은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파산선고를 받은 것이 도리어 너무 좋은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반전의 해방감을 경험한 것이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이다. 말이 안 되는 듯한 모순들이 서로 합력해서 선으로 향하는 진리의 경험이다. 십자가 사건 자체가 역설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면서 살리시며(신32:39), 찢으시면서 도로 낫게 하시는(호6:1) 이해 불가의 일을 하신다. 살아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 내 최선의 벼랑 끝에서 한계를 솔직히 고백할 때 드디어 당신이 갚아주신다. 파산선고를 받은 아담에게, 여인의 후손이라는 구원의 손길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창3:15). 의로워지려는 인고의 노력 끝에 도리어 곤고할 대로 곤고해진 한계를 인정하고 파산선고한 바울(롬7장)! 결국 생명의 성령의 새 법으로 해방의 선언을 하게 되었고 진정한 안식을 누렸다(롬8:1~2). 하나님께만 진정한 안식이 있다. 안식은 완성이다. 파산한 인생의 마지막 마침표는 주권자 하나님의 몫이다. 영광 받기 원하시는 그분의 자리를 우리는 기꺼이 내어 드려야 한다.
왕과 함께 사는 사람을 보고
십자가 언덕 아래에는 침묵만 남아있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의 눈에 예수는 로마에 의해 처형된 한 반역자에 불과했다. 그때 조용히 빌라도 앞에 나아가 담대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있었다. 아리마대 요셉이다.
당시 이단의 괴수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던 예수,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잡혀 가던 상황이었다. 주님의 제자들도 한 곳에 숨은 채 문을 걸어 잠그고 벌벌 떨었을 때 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해 걸어간 사람, 아리마대 요셉(막15:46).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이 사용할 무덤 안에 안치했다. 세상은 예수를 실패한 지도자로 보았지만, 요셉은 그를 진정한 자신의 왕으로 모신 것이다.
조선의 역사에도 폐위된 왕으로 살다가 애절하고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던 사람이 있었다. 얼마 전 한국 영화계에 폭풍 같은 바람을 일으켰던 ‘왕과 사는 남자’에 나오는 주인공, 조선 시대 강원도 영월의 평범한 마을 호장이었던 엄흥도라는 사람이다.
‘역적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리라’는 세조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버려진 왕의 시신을 거두고 정중하게 모셨다.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선택이었다. 단종의 시신을 묻은 후에 자신과 조상의 족보를 없애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존재 자체가 사라진 무명인으로 살아야 했던 오랜 세월, 200여 년이 지난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고 엄흥도 역시 ‘충의’라는 시호를 받았다. 생명을 걸고 눈물로 시신을 안장했던 그 자리는 오늘날의 ‘장릉’이 되었고 역사는 그의 이름을 충성스러운 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엄흥도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모시는 왕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자세로 대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간 제자들과 달리 나는 주님을 끝까지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온몸의 피를 쏟으며 고통 속에 호흡이 식어가는 예수님 앞에서 나는 묵묵하게 주님과 눈을 마주하며, “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주님 사명을 이어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오늘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보자. 예수님만이 나의 왕이라는 고백이 나의 삶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관점의 변화, 삶으로 바꾸는 감사의 고백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더라도 어떤 렌즈를 통해 보느냐에 따라 카메라에 담기는 장면은 전혀 달라진다. 우리 삶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나 눈앞의 조건에만 시선을 두면, 인생은 수많은 문제와 파도로 가득한 불안한 바다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선의 방향을 돌려 그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같은 현실도 거룩한 섭리와 계획 속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결국 신앙이란 내 삶을 바라보는 ‘관점(Perspective)’을 하나님 중심으로 교정해가는 거룩한 과정이다.
우리는 흔히 기뻐할 일이 생기면 감사한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일이 순조롭게 풀릴 때 드리는 감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사는 조건에 따라 쉽게 흔들릴 수 있다. 반면, 성경이 가르쳐주는 감사는 눈앞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감사이다. 시편 기자는 끊임없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07:1)”라고 고백했다. 참된 감사는 상황의 좋고 나쁨을 넘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삶을 개별적인 사건으로만 바라보면 고난과 실패는 피하고 싶은 비극일 뿐이다. 그러나 삶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큰 과정으로 바라보는 순간, 눈앞의 시련은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이 된다. 창세기 속의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창50:20) 라고 고백했다. 여기서 ‘바꾸사’라는 표현에는 절망을 역전시키고, 모든 과정을 통해 결국 선을 이루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관점을 가질 때,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
헬라어에서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Charis)에서 비롯된 말이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영혼의 상태이다.
세상을 향했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려 그분의 선하심을 인정할 때, 우리 영혼에는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이 샘솟는다. 세상은 기뻐할 조건이 있어야 감사하지만, 신앙은 아무런 조건이 없어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함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관점은 우리를 불안케 하는 환경과 수치스러운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세상을 이겨낼 힘이 된다. 우리의 가치를 세상의 평가나 성공이 아닌 하늘에 둘 때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 일을 염려하며 세상의 인정에 연연하기보다, 나를 온전히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안식하듯 살아갈 때 우리의 일상은 자연스럽게 감사의 고백으로 채워진다. 다윗의 삶이 아둘람 굴이라는 캄캄한 광야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고난이라는 단편적인 사건에 갇히지 않고, 언제나 나를 만드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시선을 고정했다.
감사는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고 계신 일, 그리고 앞으로 하실 일에 온전히 동의하고 인정하는 믿음의 결단이다. 눈앞의 시련 하나에 휘둘리기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의 섭리를 바라보는 거룩한 시선의 교정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들 때,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찬란한 은혜의 기적이 되고 감사의 시(詩)로 피어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