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오는 되어 있고?
각오는 되어 있고?
간혹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는 젊은 청년들이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나 교역자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경험했다는 설교나 간증을 접하면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직접적으로 “전도사님,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는 질문을 받으면, 오히려 필자는 이렇게 되묻는다. “음, 그래요…. 그런데 각오는 되어 있고?”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100세 되어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3일 동안 아내에게 한 마디 의논도 못하고,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는 아들의 물음에도 에둘러 답해야 했던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땠을까? 출애굽기 3장에 호렙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킬 인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모세, 자기 능력으로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지도자의 사명을 부여받고도 거부하지 못하고 지팡이를 잡고 애굽으로 향하는 모세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필자는 여태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들었다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다. 대부분 인간적으로는 원치 않는 말들뿐이다. 아브라함처럼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라든지, 모세처럼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맡기신다든지….
아프리카에서 활동하시는 어떤 선교사님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선교사가 된 남편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아프리카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살려주시든지 데려가시든지 하세요!”라고 울부짖으면서 기도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들린 음성은, “내가 너를 아프리카로 불렀다. 내가 너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네가 지금 이 모습으로 있으면 내 이름만 더럽힌다.”는 것이었단다. 눈물로 회개한 그날 이후 그 선교사님은 남편을 도와 헌신하여 아프리카에 수많은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일에 지금까지도 쓰임 받고 있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음성을 들려주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가 감히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 그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가? 각오는 되어 있고?
신혁주 전도사
약속하신 믿음의 역사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10%를 조금 넘는 두뇌를 사용하고도 천재 소리를 들었다. 보통 사람은 5%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살며, 학문의 깊은 것도 탐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지도 않는 90%의 뇌를 창조하신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맛볼 수 있는 믿음의 부분임을 믿는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을 때 뇌가 가장 완벽하게 개발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뇌파의 변화를 통해서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라고 한다. 사이소 법칙(SISO-Success In Success Out)이 있다. 성공을 입력하면 성공이 출력된다는 말이다. 파이포 법칙(FIFO-Failure In Failure Out)도 있다. 실패를 입력하면 실패가 출력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뇌의 나머지 90%를 믿음으로 채워주시어 하늘의 기적을 맛보게 하신다. 이것이 예수의 하는 일을 우리도 하고 더 큰 일도 한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요14:12~13).
그 믿음이 병든 자가 기도할 때 치료하시고,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면 해결해주시고,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기도하면 형통케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섬기고 날마다 동행함으로 하나님을 알아갈 때, 참된 지혜와 명철이 우리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개발되어져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과 축복의 부분이 바로 뇌의 90%에 채워질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김상욱 목사
유난스럽게
‘유난스럽다’는 말은 언행이나 상태가 보통과 달리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 단어는 혼자 과하게, 혹은 안 해도 될 행동을 굳이 하는 사람을 질타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이런 유난스러운 행동들은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마가복음의 한 중풍병자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친구 네 명을 부르고, 지붕에 구멍을 뚫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상에 묶여 내려갑니다. 다들 문밖에서 잠잠히 예수님 말씀을 듣는데 이 중풍병자의 행동이 참 유난스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중풍병자에게 그의 ‘믿음을 봐 죄를 사한다‘고 하셨습니다.
향유 옥합을 깨트린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비싼 향유를 깨 예수님 발에 붓는 행위를 통해 저 비싼 것을 허비했다며 질타를 받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행동을 칭찬하십니다. 굳이 값비싼 향유 옥합을 골라,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그 마리아의 행동이 누군가에겐 유난스런 행동일지 몰라도 예수님에겐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큰일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도 있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아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유난스레 나무까지 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삭개오를 보시고 그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이런 성경의 일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유난스러웠던 그들의 행동이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만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중풍병자, 마리아,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날 때 그 주위에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유난스러웠던 행동이 그들을 예수님께 기억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유난스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며 사람들은 ‘유난 떠네.’ 할 수 있겠지만, 아마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까운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중일 겁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예수님께 기억되는 특별한 성도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유난스러운 크리스천이 됩시다. 그래서 많은 무리들 중 한 명이 아닌, 그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만나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장수정
영적 문맹
대한민국은 문맹률이 낮은 국가로 유명합니다. 이를 국가의 큰 자부심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국민이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것을 국가의 엄청난 경쟁력이자 성장잠재력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20세기의 이야기입니다. 21세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에 맞춰 과거의 것을 과감히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한 채 자기 가치관만 고집하는 사람을 ‘21세기 문맹자’로 정의합니다.
오늘날 AI가 세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고 있습니다. 이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기업과 직원은 순식간에 도태되고 있으며, 시대의 거대한 파도에 집어삼켜지고 있습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술만을 고집하고 있는 사람은 이제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우리 신앙에 비춰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채, 과거의 완악함을 버리지 못하고 고집부리는 사람이 바로 ‘영적 문맹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목사님도 항상 말씀하시듯 ‘고집’은 곧 ‘불통’입니다. 고집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불통으로 만들고,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불통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많은 사람이 내 지식, 내 경험, 내 판단만이 옳다고 고집을 피우지만, 내가 아는 얕은 지식이 진리 되신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앞설 수는 없습니다.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며 말씀 앞에 귀를 막는 고집은 영적 문맹일 뿐입니다.
급변하는 AI시대 속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옛 지식을 버리고 새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 시대를 앞서가듯, 우리 역시 날마다 옛사람의 고집의 옷을 과감히 벗어야 합니다.
내 고집을 내려놓고, 새사람이 되기 위해 성령 충만을 간구하며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가 서 있는 땅을 기름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삶에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매일 나를 비우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영적 문맹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전호정 집사
영적 분별력을 구합시다
하나님은 인간이 오감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시각과 청각일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인간은 보고 들은 것 이상 초월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람처럼 미련한 사람은 없다’는 목사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만 판단해선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내 눈에 좋게 보이는 것들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인지, 인도하시는 길인지 하나님께 정확히 물어봐야 하고, 성경이 우리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하면서부터 유학의 꿈을 가져왔었습니다. 구하고 찾다 보니 상황도 점점 갖춰지기 시작했습니다. 돕는 자들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눈으로 보기에 너무나 멋지고 좋은 길이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내 스펙을 쌓는 것. 마치 주님이 예비하신 길 같았고, 주님도 좋고 나도 좋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한 곳에서 직분을 맡아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기도해보라고 하셨지만, 저는 제대로 기도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제 눈에 너무나 좋아 보이는 길이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부르시는 직분을 고사하고 유학의 길을 향해 계속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 코로나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상황으로 유학의 길은 접게 되었고, 신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1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저는 직분도 받지 못했습니다. 후에 깨닫고 간절히 주님의 뜻을 구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저에게 전도사 직분을 허락하셨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 분별력을 구해야 하고, 모르면 하나님께, 또 목사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하와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탐스러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며 소돔과 고모라를 택할 때, 그곳은 ‘여호와의 동산’처럼 좋아 보였습니다(창13:10). 그러나 그 길을 택한 결과,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고 두 딸과 더불어 저주받은 모압과 암몬 족속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반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두 번씩이나 손쉽게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게 됩니다. 옆에 있던 부하가 봐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얘기할 만큼 좋아 보이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명확한 기준이 있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까지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은 더욱 높여주셨습니다.
총회장 목사님도 누군가 거액의 헌금을 들고 와 서울 교회를 지어주겠다고 얘기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고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서울 성전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삶을 살아갈 때에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때로는 여호와의 동산처럼, 하나님이 주신 축복처럼 좋아 보이는 길이 눈앞에 있을지라도 한 번 더 하나님께 물어봅시다. 영적 분별력을 구합시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고, 더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호민 전도사
부정을 쫓아내자
가정이나 직장에서 매일 만나는 부정적인 사람, 특히 습관적으로 타인을 험담하는 사람과의 생활은 영적으로 참 힘든 일입니다. 특히, 가족관계는 단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가 쏟아내는 독설을 가만히 듣고 있기에도 쉽지 않습니다. 이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라며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는 오히려 큰 분노로 돌아오기 일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허물을 직면하기보다 자신을 지적한 상대를 새로운 공격 대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험담과 부정적인 말이 강력한 영적 전염성이 있어서, 어느새 나에게도 미움과 시기, 섭섭함이 싹트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첫째로, 성경은 악한 대화의 흐름에 동조하지 않는 ‘지혜로운 회피’가 필요함을 말씀합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20:19). 대화는 부드럽고 유연하게 이어가되, 그가 누군가를 헐뜯거나 불평을 시작할 때는 단호하게 침묵하거나 정중히 화제를 돌려 대화의 흐름을 끊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미련한 자의 입술을 떠나 나를 보호하는 성경적 방어막입니다.
둘째로, 부정이 내 영혼에 틈타지 못하도록 입술과 마음을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험담을 듣는 순간 담대히 마음속으로 “예수 이름으로 귀신아, 잠잠해!”라고 명해야 합니다. 실제로 필자도 이렇게 상대방의 입술을 보면서 귀신을 쫓았더니 신기하게도 이내 잠잠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악에 지지 않고 내 영혼과 가족, 일터를 온전히 지켜내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소망합니다.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잠18:7).
송명국 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