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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넘치고, 믿음이 말라버릴 때

1323호 · 2025-09-14
세상을 보는 창

감정은 넘치고, 믿음이 말라버릴 때

우리는 가끔 감정이 폭발하여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럴 때면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을 폭발하기보다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소유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정이 폭발할 때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지금 내 마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일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십시오. 사람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약1:19~20, 새번역).

이 말씀은 ‘사울 왕’과 ‘갈렙’을 생각나게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블레셋과 전투 이후 그 마음이 시기와 분노로 불타올라서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으며, 그 미움은 하나님과의 연결을 점점 끊어 내는 두꺼운 벽이 되어버렸다. 사울 왕의 겉모습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드렸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다. 진정한 믿음은 사라지고, 감정의 폭풍이 그를 집어삼켰으며 악신이 그 마음을 지배하곤 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 대신 자기 분노와 두려움에 길들어갔고, 결국 그 믿음이 말라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감정이 믿음을 압도할 때가 종종 있다. 이때 우리는 겉으로 충성하는 척하지만 내면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가나안 정탐 보고를 듣고 백성들이 불신과 두려움에 빠져 원망하며 소리칠 때, 갈렙은 백성들을 향해 분노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다른 마음’을 품었다.

“그러나 나의 종 갈렙은 그 마음이 남과 다르고, 또 전적으로 나를 따랐으므로, 나는, 그가 다녀온 그 땅으로 그를 데리고 가겠고, 그의 자손은 그 땅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다”(민14:24-새번역).

하나님은 갈렙의 ‘남과 다른 마음’, 곧 하나님을 전적으로 따른 마음을 기뻐하셨다. 갈렙의 마음에는 감정보다 믿음이,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했으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의 진리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우리의 믿음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이 아닌 말씀을 기준 삼아 갈렙처럼 다른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나쁜 감정이 넘쳐흘러도 우리의 믿음이 마르지 않도록!

이정금 전도사

오늘의 메시지

내가 할 수 없으면 하나님께 맡기자

누군가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저에게 왔습니다. 만약 제가 돈이 많아서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자금은 없습니다. 전문 지식이 있어서 방법을 찾아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관련 지식도 없습니다. 대단한 권력자나 재력가의 인맥이 있으면 부탁해볼 텐데, 아는 권력자도 재력가도 없습니다. 제가 가진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럴 때 믿음의 선친들은 오직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여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모세는 부르짖어 기도하여 홍해를 갈랐고. 하갈은 방성대곡하여 목숨을 연명할 샘물을 얻었고, 히스기야는 학처럼 울며 기도하여 죽음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 목사님도 어려움이 올 때마다 목놓아 부르짖어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저 또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론 미련하고 어리석은 방법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배운바 가장 위대한 사람은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저도 선친들을 본받아 하루도 쉬지 않고 이 문제를 놓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아버지, 나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아버지가 도와주셔야 합니다.” 밤낮으로 울부짖는 기도를 하나님은 듣고 계시며 쉬지 않는 기도에 하나님도 쉬지 못하고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반드시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을 믿으며, 오늘도 내일도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최성경 전도사
생명의 말씀

빈대 철학

청년 정주영이 인천 부두에서 일하고 있을 때, 노동자 합숙소는 빈대가 우글거렸다고 한다. 빈대 때문에 편하게 잠을 자기 어려웠던 정주영은 식탁 위에서 잠을 자보기까지 했지만, 빈대는 식탁 다리를 타고 올라와 악착같이 피를 빨아 먹었다고 한다. 그러자 정주영은 식탁 다리를 물이 담긴 양동이에 담가버렸다. 빈대는 물을 건널 수 없으니…. 하지만 여전히 빈대가 물기에 도대체 어쩐 일인가 보았더니, 빈대가 천장까지 기어 올라가 침대로 낙하하는 것이 아닌가. 그 후 정주영은 문제 앞에 포기하는 자들을 향하여 ‘빈대보다 못한 놈이다’라는 ‘빈대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은 피를 빨아먹기 위한 빈대의 집요함을 보며 ‘포기하지 않는 정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가 말한 ‘빈대보다 못한 놈’이라는 말은 욕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마땅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야 한다는 삶의 철학이었다.

요한복음 5장은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 이야기다. 병자는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할 때 연못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신비한 이야기를 믿었다. 그러나 그는 물이 동할 때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자신보다 병이 경한 자들이 먼저 뛰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연못으로 향한다. 가봐야 결과는 뻔한 것임에도….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는 그를 찾아오셔서 치료해주신다.

인내란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바라보고 다시 일어서는 힘이다. 마치 천장까지 올라가서라도 목적을 이루는 빈대처럼, 우리도 삶의 어려움 속에서 방향을 바꾸고, 길을 찾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도,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하신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18:1).

우리 삶에는 크고 작은 장애물이 있다. 그러나 그 앞에서 주저앉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멈추는 것이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자. 믿음의 사람은 끝까지 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끝까지 간 자만이 하나님의 열매를 얻게 된다.

임택함 목사

청춘, 그 아름다운 이름

적극적으로 나이 드는 삶

오랜만에 대학생 때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스물두 살, 스물네 살, 스물여섯 살이었던 우리는 어느덧 마흔, 마흔둘, 마흔넷이 되었지요. 시간 참 빠르다는 말이 수시로 나왔습니다. ‘나이 드니까 체력이 달린다’, ‘단어가 잘 안 떠오른다’, ‘사진 찍으면 확실 나이 든 티가 난다’는 등의 얘기가 이어졌어요. 그러다 친구 한 명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때?” 저는 답했지요. “좋아!”

저도 처음 맞이하는 40대가 낯섭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의 저보다 40대의 제가 더 마음에 듭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20대 때 저는 약속 시간을 못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꼭 일이십 분씩 늦었고, 부끄럽지만 주일예배도 간당간당하게 겨우 맞춰 갔죠.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만나기로 한 장소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됐고, 헌금위원 봉사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예배 시작 전에 앉아 있습니다.

자세도 더 좋아졌습니다. 예전엔 어깨가 구부정하고 거북목이 심했는데요, 지금은 반듯하고 곧은 자세로 유명합니다. ‘어쩜 그렇게 자세가 좋냐’는 얘기를 수없이 듣고 있어요. 뻐근한 몸을 풀어주려고 잠자기 전에 짧게 스트레칭을 한 지 4년이 넘었거든요. 귀찮은 날엔 5분 만이라도, 여유로운 날엔 30분씩 공들여 스트레칭을 하다 보니 어느새 20대 때보다 바르고 예쁜 자세가 되었습니다.

작년에는 청년에서 장년으로 넘어가는 해를 기념하며 태어나 처음으로 돈과 시간을 들여 일대일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았습니다. 미리미리 근육을 저축해두자는 마음으로요. 초반엔 일주일에 두 번, 가을쯤 지나서는 일주일에 세 번, 연말이 되어서는 혼자 하는 운동까지 더해 일주일에 다섯 번 근력 운동을 했죠. 저의 딴딴해진 허벅지를 만져본 친구들마다 감탄합니다.

나이 들면 근육이 빠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유튜브에서 본 어느 70대 할머니는 달랐습니다. 허리 통증이 심해서 매해 응급실에 실려 갔던 그녀는 50대 후반이 돼서야 근력 운동을 시작했대요. 아프다고 누워있기보단 박차고 일어나 헬스장에 간 거죠. 운동한 지 14년이 된 지금은 여느 프로선수 못지않은 근육과 힘을 갖고 있고 웬만한 젊은이보다 훨씬 탄탄하고 아름다운 몸을 유지하고 있더라고요. 저의 70대도 이와 같길 바라고 있어요.

올해는 수영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서른네 살의 저는 접영을 못하고 그만뒀지만, 지금의 저는 접영을 곧잘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40대 중반이 될 즈음엔 얼마나 더 잘하게 될지 기대됩니다. 수영 실력만 늘어난 게 아니에요. 매일 기도하는 양도 늘었습니다. 이전에는 하루 30분, 가끔 1시간 기도했었는데 올해는 노량진 교육관에서 한 시간 반씩 기도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세월을 피해 갈 순 없죠. 그렇지만 저는 시간이 가니까,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나이 들고 싶지 않습니다. 한살 한살 꿈꾸는 대로, 적극적으로 나이 들고 싶습니다. 육체도 영혼도 신앙도 끊임없이 성장하길 원해요.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길 소망합니다.

신은혜

Good News

의학의 발달과 삶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평균수명이 길어져서 100세 시대라 이야기들 하지만, 변함 없는 한 가지 진리는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장수자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지만 결국 죽었고, 신하들에게 불로초를 찾아 나서게 했던 진시황제도 죽었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호걸들도 죽음을 맞이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영원히 사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요11: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었던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복락의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인생의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웰 다잉(Well dying)’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웰빙(Well beiing)’과 ‘웰 다잉’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웰빙’이요, 사후에 천국 가는 것이 ‘웰 다잉’입니다.

상화평 목사

주님을 향한 노래

주님께 받은 은혜

기도원 집회 때 헌금송으로 연주된 ‘똑바로 보고 싶어요’라는 찬양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이 찬양은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송명희 시인이 작사한 곡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장애로 인해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는 아픔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하면서도, 그런 자신도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하는 마음이 가사 한 절 한 절에 짙게 담겨 있습니다. 현재까지 그분은 200여 편이 넘는 찬양을 작시하고, 간증을 통해 수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를 되돌아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아무런 장애도 없는 건강한 육체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더 많은 것을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번은 ‘무당 엄마 목사 아들’이란 어느 목사님의 간증 책을 읽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고향은 인천 용유도로, 섬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무속신앙이 즐비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래도 집안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믿게 되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까지 했는데, 군 복무 시절에 갑자기 어머니가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부터 엄청난 핍박과 함께 영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맨발로 외작두를 타며 무형문화재 급으로까지 평가받는 영험한 무당이 되었고,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가족들도 다 어머니 편에 서서 핍박했습니다. 결국 집에서 쫓겨나와 타지에서 생활하면서도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았더니 마침내 그 어머니가 예수님을 만나 권사님이 되셨고, 아들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를 되돌아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모태신앙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교회에 간다고 핍박은커녕 오히려 칭찬을 듣고 차비와 용돈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더 성숙하고 굳건한 믿음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아 죄송스러웠습니다.

요즘은 SNS 문화가 발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남들과 비교하는 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음식을 누리지 못하면 그게 전부인 양 열등감과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세상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들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 부르신 상황과 환경은 다 다르고,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안계훈 원장님이 쓴 교회 신문 글(1143호)에 보니 건강한 육체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51억 정도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을 받게 된 것은 계산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거기에 준 자와 받은 자만이 아는 은혜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한 걸음 더 장성한 자녀로서 어떡하면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지, 기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히12:28).

이호민 전도사

참된 깨달음

성찰과 통찰

저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를 돌아봅니다. 이 시간은 제 삶의 방향을 점검하고 바로잡는 소중한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저의 삶을 이끄는 두 가지 중요한 눈, 바로 ‘성찰과 통찰’을 사용합니다.

‘성찰’은 내면의 어둠과 부족함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거울과 같습니다. 타인을 탓하거나 환경을 핑계 삼지 않고, 오직 제 마음과 행동을 깊이 반성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좌절감,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길 때면 성찰의 시선으로 저를 살핍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회개합니다. 그 순간 평안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성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통찰’입니다. 통찰은 단순히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시각으로 본질을 꿰뚫어 보는 능력입니다. 갈등과 어려움 속에서 성찰이 저의 교만을 깨닫게 했다면, 통찰은 용서와 화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성찰이 저를 겸손하게 만들었다면, 통찰은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 삶의 균형과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성찰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게 했다면, 통찰은 그 눈물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소망을 보게 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속에서 성찰이 저를 붙들어 주었고, 책임져야 할 자리에서 통찰은 다시 걸어갈 힘을 주었습니다. 성찰은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지만, 통찰은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합니다. 성찰은 제 안을 비추는 거울이고, 통찰은 그 거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등불입니다. 성찰은 제 작은 신음까지 하나님께 아뢰게 했고, 통찰은 그 신음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과 인도하심을 듣게 했습니다.

이제 저는 두려움 속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언약의 말씀 안에서 성찰로 제 마음을 살피고, 통찰로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걷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여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삶을 인도하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오늘도 성찰과 통찰이라는 두 눈으로, 주님 안에서 묵묵히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양은정 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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