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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베푸신 잔치

1319호 · 2025-08-17
빛과 소금

주님이 베푸신 잔치

우리 교회는 해마다 여름이면 영적인 잔치가 열린다. 수련회, 성경캠프, 산상집회로 이어지는 3주간의 일정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고 초대하신 은혜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영의 양식뿐 아니라 육의 양식도 더 풍성해지고 감사와 은혜가 더 충만해지는 것을 느낀다. 성도들을 자식처럼 아끼는 목사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어 더욱 감동이 짙다.

이 잔치의 또 하나의 큰 축복은 남녀노소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신나는 캠프 속에서 복음을 접하고, 학생들은 잠시나마 학업의 무게를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쉼을 얻으며,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잠시 세상의 경쟁과 책임,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다.

아무리 크게 부르짖고 마음껏 찬양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하나님께 나의 결핍과 갈급함을 적극적으로 아뢸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매일 사랑으로 정성껏 준비된 식사와 커피를 대접받는 이 행복함도 잔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잔치는 영의 눈이 열린 사람만이 진정으로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그것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그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

세상에서는 ‘공짜’라 하면 의심부터 하게 마련이지만, 우리 교회의 영적인 잔치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이 은혜는 세상의 공짜와는 완전히 다르다. 덜 가치 있어서 무료가 아니라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기 때문에 무료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Priceless한 은혜이다!

이렇게 귀한 영적 대잔치를 열어주시고 초대해주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고, 말씀으로 온 힘을 다해 먹이시고 섬겨주신 목사님, 그리고 기도와 물질, 시간, 봉사로 아낌없이 수고해주신 모든 분들의 손길 하나하나를 다 기억해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린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송지혜 집사

hello-english@naver.com

오늘의 메시지

예수만 바라보자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한다. 결과는 토끼의 패배로 끝났다.

이유는 간단하다. 토끼는 푯대를 바라보지 않고 상대인 거북이를 바라본 것이고, 반면에 거북이는 묵묵히 푯대만 바라보고 나아가 승리하게 된 것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실패와 좌절 가운데 낙망하며, 그 믿음을 통한 권세를 잊어버리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왜인가? 이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만을 바라봐야 하는데 다른 것에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보고 물 위를 걸었으나 물결을 보는 순간 빠졌다(마14:28~30). 가룟 유다가 예수만 보다가 돈에 눈길을 뺏기는 순간 배신하게 된다(마26:14~16, 요12:4~6).

그러나 혈루증 여인은 예수만 바라보고 나아갔을 때 고침을 받았고(막5:25~34), 소경 바디매오 역시 예수만 의지하며 부르짖었을 때 눈을 떴고 (막10:46~52), 들것에 들린 중풍병자는 예수를 향해 지붕까지 뜯었더니 나음을 입었다(막2:3~5).

목사님은 목회 여정에서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거나 옆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예수만 보고 앞을 향해 가셨기에 오늘의 성공자가 되셨다고 간증하시며, 당신을 닮으라고 강조하신다. 사슴 잡으러 갔다가 토끼에 눈길 뺏기지 말고, 산삼 캐러 갔다가 도라지에 미혹되지 말고 목표에 집중하라 하신다.

우리 이제 변함없이 예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자. 영·혼·육으로 온전케 하시는 예수의 은혜와 응답을 맛보게 될 것이다.

김상욱 목사
생명의 말씀

창조 신앙이 답이다

미국 대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더니, 성경에 대한 믿음이 떠난 이유로 상당한 비율이 학교에서의 진화론 교육을 꼽았단다. 진화론을 배우는 중학교 시절부터 성경에서 마음이 멀어져 점차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는 통계가 나왔다.

진화론은 사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믿고 싶은 또 다른 신앙 체계다. 그 사상으로 기울어지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세상(하나님, 천국, 인간영혼, 마귀, 귀신)에 대한 신앙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물질세계뿐이다.

진화론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 장악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문화를 통해 인간의 정신영역까지 지배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모든 것이 우연히 되었으니 어떻게 살아야 할 뚜렷한 목적이 없다. 인간의 본능이 더 중요하기에, 더 이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뜻대로 살지 않고, 창조 질서를 뛰어넘는 진화론적인 위협도 본인이 행복하다면 선으로 여긴다. 절대적 창조질서의 기준이 무너져가는 이 시대의 문화와 교육현장이 우려스럽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인간들이 그 주도권을 빼앗은 것이다.

사실 나도 자녀 셋을 둔 부모로서, 학교 교육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도 2009년을 기점으로 교육과정이 개편되면서 한 학기 동안 거대한 진화론 시나리오를 강제로 주입 받아야 하는 실정이다. 우주의 기원부터 인류의 출현까지를 창조주 하나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진화 스토리로 엮어서 가르치니,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종교 설화로서 매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된다. 이런 사상이 서서히 국민 상식이 되어 가면, 학교 교육은 다양성 있고, 중립적이고, 과학적인데 반해, 교회 교육은 창조신앙만을 가르치는 일방적이고 편협한 미신이라고 폄하하게 된다. 학교 교육과 교회 교육이 서로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 언약백성의 삶의 원리로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 온 세상의 창조주는 교회 안에만 계시지 않는다. 창조의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야 살아난다.

이번 여름 중고등부 수련회를 통해 총회장 목사님이 가르치신 창조신앙(성공한 사람은, 창조의 법칙을 따른 자들이다) 교육은 참으로 시기적절했다. 성경과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교육현장 속에서, 자녀들이 가져야 할 확실한 기준을 심어주셨기 때문이다.

송직화 목사

청춘, 그 아름다운 이름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믿음

추위를 많이 타는 저는 겨울보다 여름을 좋아합니다. 12월부터 여름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예요. 그런데 이번 여름에는 고생 좀 했습니다. 더위 때문이 아니라 냉방 때문에요. 바깥은 연일 폭염주의보가 내리며 한증막이 따로 없는데 실내에만 들어서면 에어컨 바람이 겨울처럼 불어와 몸에 한기가 들더라고요. 어느 날엔 급기야 콧물이 나오더군요. 혹시 몰라서 코로나 진단키트로 검사해보니 다행히 음성으로 나왔습니다. 미열도 없고 기침도 안 나오고 코를 훌쩍이는 것 말고는 별다른 증세가 없어 이러다 금세 좋아지겠지 했어요.

며칠이 지나 수요일이 되었습니다. 간간이 기침도 나고 목소리도 잠겼지만 컨디션은 괜찮아서 여느 때처럼 아침에 수영하고 마스크 쓰고 출근했습니다. 그런데 오후부터 기운이 급격히 떨어지더니 눅진한 피로가 몰려오더라고요. 오후 4시쯤 외근을 마치고 일찍 퇴근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쉬어야 저녁 수요예배에 참석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집에 오자마자 씻을 힘도 없어서 편한 옷으로만 갈아입고 거실에 철퍼덕 누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7도를 웃돌던 날씨였는데 그날은 비가 쏟아져 으슬으슬하길래 난로를 꺼내 가장 높은 온도로 켜고 그 옆에 몸을 둥글게 말아 누웠습니다. 기침의 빈도와 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몸 상태는 바닥을 쳤습니다. 집에서 교회까지 대중교통으로 1시간 10분 정도 걸리니까 일단 저녁 7시까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잠시 후 눈을 떠 보니 오후 6시.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콜록콜록. 다시 눈을 떠 보니 오후 6시 30분. 몸이 천근만근, 열도 나는 듯했습니다. 콜록콜록. 어느새 오후 6시 50분. 도저히 밖에 나갈 컨디션이 아니었어요.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릴까? 그러면 얼른 전도사님께 연락드려 헌금위원 봉사를 못 한다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콜록콜록. 누구라도 이 몸으론 가기 힘들 거야. 콜록콜록. 그런데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지금 상태로는 설교만 틀어놓고 누워서 곯아떨어질 게 분명한데…. ‘교회 가서 제대로 예배드리자.’

택시를 불러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려 했는데 하필 비가 많이 내려 택시가 대중교통보다 오래 걸리는 게 아니겠어요. 결국 땀으로 축축해진 몸을 수건으로 닦고 헌금위원 하복 대신 따뜻한 춘추복으로 갈아입고 발이 젖지 않게 레인부츠를 신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갔습니다. 열차를 타고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고 1시간이 넘게 걸려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가는 길에 한 가지 기도만 했어요.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컨디션을 달라고요. 예배가 시작되고 한참 지나서까지도 기력이 회복되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괴롭혔던 기침은 완전히 멈춰 평안히 예배드릴 수 있었고, 예배를 마칠 즈음이 되자 비로소 평소 컨디션으로 돌아와 헌금위원 봉사도 가뿐히 하고 집에도 거뜬히 갔습니다.

저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예수님이 저도 낫게 하실 거란 믿음, 그 믿음이 그날 수요예배를 온전히 드릴 수 있게 했습니다. 헌금위원은 하나님이 맡기신 귀한 직분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한여름에 춘추복을 입고서라도 봉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저에게 들어오는 모든 소득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믿음, 그 믿음이 민생회복 소비쿠폰을 받자마자 십일조부터 떼게 했죠. 나의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믿음, 그 믿음이 여름휴가를 기도원으로 가게 했고요. 저의 믿음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죠.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신가요?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

신은혜

dopal0203@naver.com

한라에 핀 샤론의 꽃

기도와 의무의 조화로운 신앙

그리스도인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 특권과 함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삶의 의무와 책임도 주어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란 무엇일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위해 늘 기도해야 한다. 매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언제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하나님께 여쭙고, 말씀을 묵상하며 그분의 뜻과 섭리를 분별해 가야 한다. 마치 자녀가 부모에게 지혜를 구하고 도움을 요청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해 나가는 삶이 어쩌면 기도 자체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당신이 강가를 지나가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았다고 해보자. 다행히 근처 나무에 구명대가 걸려 있다면, 당신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직접 물에 뛰어들 수도 있을 것이고,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구명대를 던지거나 다른 방식으로 도우려 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바로 이런 모습이 기도와 의무가 조화를 이루는 건강한 신앙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만일 구명대를 던지지도 않고 구조 요청도 하지 않은 채, 무릎 꿇고 기도만 한다면 어떨까? 이는 하늘만 바라보며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갖기 원하신다. 그리고 그런 최선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더 하신다. 기도 없이 우리 의무만 감당하려 한다면, 우리는 곧 지치고 탈진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가끔 ‘기도’ 자체가

‘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믿음과 순종이 분리될 수 없듯, 기도와 행함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기도했으니,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

“기도했으니, 오늘은 안전할 것이다.”

“기도했으니, 시험에 합격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신앙이 아니라, 신앙을 이용한 자기 확신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영역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일하기를 원하신다. 기도만 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온전한 믿음의 모습이 아니며, 기도와 함께 성실히 노력하는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믿음이다.

우리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머물도록 항상 기도하며, 동시에 모든 일에 있어 우리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진정한 균형 있는 신앙의 모습이 아닐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18:27).

Dr. 권정미

jmgood77@gmail.com

참된 깨달음

헌신

얼마 전, 팔순이 되신 아버지께서 갑작스러운 구토와 어지럼증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 혹시 뇌졸중이 아닐까 가슴이 철렁했지만, 검사 결과는 다행히 이석증이었다. 응급실 복도를 천천히 걸어 나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작게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다. 군에서 장교로 복무하셨기에 늘 꼿꼿하게 걷던 분이셨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젊음은 오롯이 가족을 위한 헌신의 시간이었고, 그 보살핌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팔순이 되신 후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부모의 헌신 덕분에 자녀가 든든히 설 수 있듯이, 교회 역시 목사님, 장로님과 권사님들의 한결같은 헌신 위에 세워졌다. 최근 장로님, 권사님들이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자주 접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변함없이 성전 문을 열고 예배를 준비하시던 그분들의 헌신적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군가는 강단에 꽃을 꽂고, 또 누군가는 설교단을 만들고, 의자를 나르고, 구석진 곳을 묵묵히 쓸어내는 손길들이 모여 오늘의 든든한 예수중심교회가 되었다. 비록 세월 앞에서 육신은 쇠해가도, 그분들의 불같은 신앙과 섬김은 오히려 젊은 날보다 더욱 빛나는 것 같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각자에게 주신 은사대로 봉사하며 사랑으로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헌신의 모습일 것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목사님과 헌신의 자리를 지키는 장로님, 권사님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며, 그 값진 믿음의 길을 따라가고자 다짐한다.

송명국 집사

songmko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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