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작가 생각의 결과물이다(렘6:16~19)
“불황이라 안 돼.”, 그 사람은 분명히 안 됩니다.
“그건 불가능해.”, 그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든 불가능합니다.
“불치병이라 못 고쳐.”, 그 사람은 죽을 겁니다.
이들이 잘 되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겁니다. 제가 좀 지나칩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분명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하셨습니다.
가시나무를 심었는데 무화과를 딸 수 있나요? ‘말이 씨다’라고 세상 사람들도 말하지요? 불황의 씨를 뿌렸으니 불황이 되어야 맞고, 불가능의 씨를 뿌렸으니 불가능해야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입니다. 불치병이라 뿌렸으니 회생이 불가한 겁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가나안을 정탐하고 온 자 중에서 10명은 ‘못 들어간다,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그들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자나 깨나 말조심해야 하는 이유를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잠13:2). 복도, 화도 입으로 자초한다는 말입니다.
누에 아시죠? 누에가 자기 입에서 뿜어내는 실로 자기 몸을 칭칭 감지 않습니까? 말이 이와 똑같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나를, 내 삶을 칭칭 동여맨다는 겁니다(약3:2). 그래서 이왕이면 좋은 말, 긍정적인 말, 적극적인 말, 아름다운 말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그것들이 내 삶을 감싸 아름답고 좋은 인생이 되는 겁니다. 가수들이 자기들이 부른 노래 가사대로 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노래도 말인지라 계속 불러대니 가사가 그들을 칭칭 감아 그런 겁니다.
그런데 말이란 것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닙니다. 생각대로 말이 나오는 겁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말이 곱게 나옵니까? 나발이 다윗에 대해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삼상25:10~11)라고 말한 것은, 그날 나발이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평소 그가 다윗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마리아가 깬 옥합에 대해,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12:5)고 말한 것은 그 생각 속에 탐심이 가득했기에 그리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4~3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요, 생각대로 말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말을 고치려면 근원인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나무가 열매도 못 맺고 시들시들할 때 가지치기하고, 거름을 줘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근본인 뿌리를 살펴야 합니다. 뿌리가 썩었는데 거름 주고, 물 주면 더 썩을 뿐이지요. 썩은 뿌리를 잘라내야 나무가 삽니다.
인생이 시들시들하고, 열매가 없다면 뿌리인 생각을 살펴야 합니다. ‘안 된다’, ‘못한다’, ‘죽을 거 같다’…. 이런 말은 부정적인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니 그 생각을 잘라내야 합니다.
생각이란 것이 참 무서운 겁니다. 얼마 전에 제가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가서 여러 가지 검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의사를 통해 검진결과를 듣는데, 의사가 그러는 겁니다. “고령자라 죽을 수도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순간
‘아~ 조심해야지.’ 하는 생각이 쑥 들어옵디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곧 ‘귀신아, 가라!’ 하고는 ‘난 120까지 살거야.’라고 생각을 바꾸고, 그 시로 병원을 나왔습니다. 만일 제가 그 말을 받아들였다면 계속 병원 신세나 지다가 죽었을 겁니다.
마귀란 놈은 다른 건 하지 않고 슬쩍 나쁜 생각만 넣어줍니다. 마귀가 하와의 입을 벌려 강제로 선악과를 먹인 게 아닙니다. 그저 “선악과를 먹어도 안 죽어.”라는 생각만 주입했을 뿐인데 결국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마귀는 예수님을 팔 생각만 넣었습니다(요13:2). 그 생각이 들어가니 예수님이 그를 건지고자 계속 던지는 말씀이 들리지 않았고, 결국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판 것입니다.
여러분, 내 생각이 바뀌면 하나님의 생각도 바꿀 수 있습니다. 한나는 무자(無子)했습니다. 하나님이 태의 문을 닫으셨기 때문입니다
(삼상1:6). 그러나 한나는 남편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나도 브닌나처럼 자식을 갖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갖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사 한나에게 자녀를 주십니다. 그것도 세상에 둘도 없는 근사하고 의로운 아들, 사무엘을 주십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왕하20:1)고 말합니다.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 히스기야는 ‘지금 죽을 수 없다.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 즉시 면벽하고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사 그를 낫게 하셨고, 수한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잘살아야겠다’, ‘나도 좋은 집에 살아봐야겠다’, ‘나도 능력을 받아야겠다’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건강해서 120세까지 주의 일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좋은 생각하면 세금 내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궁상맞은 생각, 부정적인 생각, 극단적인 생각을 합니까? 어느 유행가처럼 ‘못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입니까? 저는 싫습니다.
작품은 작가 생각의 결과물입니다. 제가 그림을 그릴 때 무엇을 그릴까 생각하는 대로 결과가 나옵디다. 인물화를 그리겠다 하면 인물화가 나오지 풍경화가 나오지 않습니다. 붉은 하늘을 그려야지 했으면 붉은 물감을 사용하지, 파란 물감을 쓰지 않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불행을 생각하는데 행복이 올 리 없고, 실패만 그리는데 성공이란 작품이 탄생할 리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는 부모 DNA가 있어 닮는 법, 하나님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시니 그의 자녀된 우리도 불가능은 없습니다. 불가능이란 생각이 존재할 뿐이지요. 그래서 생각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고 바꾸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왜냐?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이 귀에 들린 대로 쏟아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민14:28).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말과 기도를 들으시고 힘을 주시고, 길을 열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살다 보면 앞에 바다가 떡하니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그때 ‘안 되겠네’라고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 바다를 넘을 수 있을까’ 생각하세요. 그런 생각을 한 자들이 배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든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살리고야 말겠다고 생각한 네 명의 친구들이 그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사람이 많아 갈 수 없을 때 ‘다음에 하자’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예수님 앞에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지붕을 뚫은 것 아닙니까?
예레미야 6장 19절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울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내 인생은 내 생각과 말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부정적인 생각, 편협한 생각, 악한 생각을 버리고 좋은 생각, 긍정적인 생각, 예수님처럼 넓은 생각을 하라는 겁니다.
오늘부터 생각을 바꿉시다. 나쁜 생각을 할 때마다 허벅지를 꼬집어서라도 일부러 좋은 생각을 하면 그것이 곧 습관이 될 것이고, 그 습관이 당신의 운명을 바꿀 것입니다. 할렐루야!
뿌리가 썩은 나무에
물을 주지 말라
생각이 말을
말이 인생을 바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