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공간의 여유
빈공간의 여유
인사동 골목의 한 화랑에서 ‘빈 공간의 여유’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을 마주했습니다. 큰 캔버스 위에 달랑 점 4개만을 찍어 놓은 유화였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해보라는 작가의 의도가 깔린 듯했습니다.
공간은 낭비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절대 휴식을 의미하고 새 창조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때론 공간을 두는 것이 복잡한 설명보다 때로는 더 큰 웅변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꼭 짜인 틀과 숨이 막힐 듯한 복잡한 구조에 익숙해 있습니다. 뭔가 조금 비어 있으면 불안한지 무엇으로든 그곳을 메우려고 합니다. 이제는 공간의 의미를 새로이 자리매김하면 좋겠습니다. 공간은 여유입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삶에 공간을 만들어 봅시다. 공간이 있어야 남들도 찾아올 것입니다. 공간이 있어야 새로운 것이 보이게 됩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없게 차단된 우리 삶에 여유를 가집시다. 그 공간에 사랑을 심고, 낭만을 품고 흥을 북돋아 봅시다. 재물로 가득한 손을 풀어 그 손에 사랑이 일게 하고, 욕심을 버린 그 공간에 이웃을 가집시다. 인간의 지식과 꾀를 버리고 그 안에 하나님이 오시게 합시다.
적당한 선에서 마음을 절제하고 이웃을 돌아보며 나라를 생각하는 여유로운 자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고고하기까지 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다섯 끼니 먹습니까? 이불 두 채 덥고 잡니까? 자동차 두 대를 동시에 끌고 다닐 수 있습니까?
족함을 아는 자에게 여유가 있고 빈 공간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에 감사하며, 오늘에 만족하는 삶을 삽시다. 여유 있고 아름다운 삶이 당신에게 도래하기를 바랍니다.
옹달샘 중에서
양화진 외국인 묘지 안장 제1호 선교사
존 헤론 선교사(혜론1856~1890)는 1884년 4월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의 첫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발생한 갑신정변으로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정해지자 일본에 머물다가 1885년 6월 21일 한국에 도착했다.
영국에서 태어난 헤론은 14세에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1883년 테네시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다. 모교 테네시대학 의학부 교수로 초빙을 받았으나 헤론은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고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20대에 모교의 교수로 임명되는 명예로운 자리를 거절했다. 어느 부흥회에 참석해 기도하던 중,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땅끝으로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한국행에 나선 것이다.
그는 서울에 도착해 서울 정동의 알렌 집에서 헤론 선교사 부부, 메리 스크렌턴 여사, 알렌 의사 부부와 함께 한국에서 첫 주일예배를 드리고, 제중원에서 사역을 시작하며 알렌을 도왔다.
그 후 알렌이 외교관직으로 변경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1887년 9월부터 2대 제중원 원장으로, 고종의 어의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가난한 백성을 돌보는 의사로서 헌신하였다. 그의 뛰어난 의술은 조정에서도 신임을 얻게 되어 종이품의 높은 벼슬도 받게 되었다. 제중원에 양반층은 주로 왕진을 요청했으며, 지방에서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도 적지 않아 개원 이래 첫 1년 동안 10,46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고 한다. 환자들의 대부분 질환은 말라리아가 가장 많았고, 그 외에 소화 불량, 각종 피부병, 성병(매독), 결핵, 나병, 기생충병, 각기병 등이 있었다. 당시 이질, 장티푸스, 천연두 등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기여서 많은 환자가 발생하였으며, 헤론은 서울 및 지방을 순회하며 환자를 돌보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한국을 얻는다는 희망이 없다면 나는 이곳에 하루도 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병원 사역 외에도 성서번역에 참여하며 기독교 출판 사업인 ‘조선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창설을 기획하여 문서선교의 출발을 알렸고, 후일 한국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헤론은 의료·교육·전도·문서·여성 등 다섯 가지 분야가 함께 움직이는 ‘통합적 선교 신학’을 갖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힘썼다. 그의 열정과 헌신은 한국인들과 내한 선교사들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헤론은 동료들에게 따뜻하고 우정이 넘치면서도 보수적이고 엄격한 도덕주의자였다고 한다. 본국에 보낸 서신에서 단순히 자신의 의학 기술을 시행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열망하며, 위대한 의사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한국에 와서 사역한 지 불과 5년(1885. 6. 12~1890. 7. 16) 되는 해인 1890년 여름,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있을 때, 다른 선교사들은 남한산성의 휴양지에서 쉬고 있었지만, 그는 폭염 속에서 서울까지의 먼 거리를 드나들면서 환자들을 치료해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더위와 많은 업무로 과로한 상태가 되어 병이 들었다. 남한산성에서 요양하고 돌아오던 날 100리밖에 전염병에 걸린 사람의 소식을 듣고 아직 완쾌되지 않은 약한 상태에서 진료하다가 자신도 이질에 걸려 1890년, 발병 3주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890년 7월 26일, 한국 선교 활동 5년 만인 3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여 동료 선교사와 한국인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그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남한산성 휴양지에서 밤새도록 가마 타고 집으로 돌아온 부인과 두 딸을 옆에 두고, “한국과 한국인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싶소.”라고 말한다. 헤론은 아내에게 조선에 남아서 선교의 일을 계속해달라고 하였다. 아내와 언더우드에게 “자신의 사역이 참 보잘것없었지만, 그것은 모두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하였다.
또한 병원에서 함께 일하던 조선인들을 부르게 하고 죽기 전 유언처럼 남긴 한마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라고 복음을 전하고 임종하였다.
그의 죽음에 한국인 환자도 울고, 동료 선교사들도 울었으며, 그를 알고 있는 정부 고관들도 울고 말았다. 가난한 환자를 진료하는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열정은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헤론의 갑작스러운 순교로 인해 시신을 묻을 곳이 없었는데, 고종에게 선교사 묘지를 요청하여 마포 양화진 땅을 하사받았고, 헤론의 시신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 나루터 언덕의 묘지에 묻혔다. 이것이 양화진 선교 묘지의 시작이다.
양화진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게 주셨다.”(갈2:20)는 성경 문구가 기록되어 그가 한국을 사랑하고 헌신한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5년의 짧은 선교사 생활이었지만 헤론은 자신의 모든 안락한 삶과 누릴 수 있는 가치들을 내려놓고 부르심에 따라 이 땅에 자신을 드리며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는 종으로 살았다.
김종춘 목사
체력을 길러야지
이제 곧 중학생이 되는 첫째 아들이 내게 말한다.
“아빠, 저는 제 꿈이 뭔지 아직 모르겠어요.”
나는 대답했다.
“그렇구나, 아빠도 아직 찾는 중이야.”
그러고는 덧붙였다.
“꿈을 일찍 찾는 사람은 참 복이지. 그런데 꿈을 나중에서야 찾는 사람도 있어서, 그때까지는 내가 할 본분을 다하며 계속 찾아야 해. 그래서 아빠도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지금 일이 아빠의 꿈은 아니야. 그래서 나중에 무슨 사업을 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꿈을 계속 찾는 중이야.”
이렇게 아들에게 설명은 했지만, 꿈을 빨리 찾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다. 유치원 때 내 꿈은 엄마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사님 안수로 하나님이 고쳐주셔서 굳이 의사가 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어렵다고도 느꼈다. 중학생 때 잠깐 가수의 꿈을 꾸다 백화점 사장님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백화점 사장님은 되는 게 아니고, 태어나는 거라는 말을 듣고 금방 접었다. 고등학생 때에는 CCM 가수들을 양성하는 CCM 기획사를 꿈꾸었다. 대학생 때는 공항이나 호텔에서 일하고 싶었다가, 결혼 후에는 가정을 잘 책임질 수 있는 회사에 다니는 것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아니, 현실에 맞춰졌다고 해야 하나.
신바람 나는 일이 천직이라 하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그런 바람이 난 적이 없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걸 주변 모두가 아는 일도 천직이라 하는데, 그런 적도 없는 것 같다.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다가 거기에 도달하면 또다시 연결되는 다른 목표가 생긴다고도 하는데, 아직까지 내게는 이직이 전부였다. 그런데 최근에 들은 이 말이 내 마음에 확 와닿았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할지 모르겠을 때는 운동을 하며 체력부터 길러라. 그래야 정말 내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에 도전할 수 있고, 시작할 수 있고, 꾸준히 지속할 수 있다.”
아들에게 다시 말했다.
“아들아, 우리 꿈을 찾을 때까지 체력부터 길러놓고 있자!”
박찬영 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