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글씨 크기 보통16
1283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No cross, No crown

1283호 · 2024-12-08
To Be Succeeded

No cross, No crown

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엄마는 매번 복음을 전하셨다. 돌아오는 것은 고함과 핍박뿐이었지만. 양가 집안에서 처음 예수를 믿은 엄마의 기도는, 그래서 늘 눈물과 간절한 부르짖음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 친척들이 엄마에게 사례를 표하는데 이유는 하나다. 덕분에, 자신들이 이렇게 예수를 믿고 복 받고 산다고 말이다. 우리 형제자매가 입을 모아 엄마께 감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80이 넘는 지금까지 기도로 자리를 지켜주시는 모습에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핍박하던 일가친척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자손들이 주님의 일꾼들로 자라는 것이 그동안 수고하고 희생해온 엄마에게는 기쁨이고 위로이며, 하나님 앞에 드릴 열매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반전이고 은혜이다.

야곱의 일생은 우리네 인생을 대변하는 듯하다. 형을 피해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는 길에 돌베개를 베고 잘 때, 또 라반 집에서 별 보고 들에 나가고, 별 보고 집에 들어오는 고단한 여정 가운데, 그는 자기가 거부가 되어 돌아갈 것을 알았을까? 아내들의 시기와 분쟁으로 마음 고생하며 열두 아들을 낳을 때도 그들이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어 하나님의 대역사를 이루어갈 것을 몰랐을 것이고, 요셉을 잃었다고 여기고 비통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역시 온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할 것과 그것이 출애굽의 대역사를 이루어가는 시발점이 될 것을 몰랐을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고생, 실패로 점철된 인생으로 여겨질지 몰라도 그는 하나님의 강한 손에 붙들려서 그분의 완전한 계획과 경륜 가운데 일생을 살았고, 또한 마무리하여 믿음의 조상의 대열에 당당히 올랐다.

아브라함, 야곱, 다윗, 바울 등등 성경의 믿음의 선친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목사님도 수많은 핍박과 환난의 비바람 가운데 눈물의 씨앗을 뿌리고 믿음의 가지를 드리워 세계 곳곳에 열매를 맺어오셨고, 또 수많은 믿음의 거인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기도의 뿌리를 힘써 내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가고 있다.

No cross, no crown! 고난 없는 영광이 없고, 바꿔 말하면 고난과 역경이 있기에 영광의 면류관을 기대할 수 있다. 이 소망을 발판 삼아 고난과 역경을 넘어서고 이겨낸다면, 우리 모두 반전의 인생과 영생을 취하고 누리는 주인공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

이국진 사모

책을 펴다

망각

누군가 세월이 약이라고 했습니다. 명언 중의 명언입니다. 세월보다 아픔을 달래기에 좋은 위로제는 없고, 세월보다 고통을 치료하기 좋은 비법은 없습니다.

때론 잊는 것도 복입니다. 기억이 옅어지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 삶을 다 가슴에 담고 있다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머리도 아마 돌아버릴 것이 분명합니다. 아픔이 누적되고 고통이 겹겹이 되어 그것에 눌려 신음하다 죽을 것입니다.

망각!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지난 것은 지난 세월에 묻으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평생 화를 끓여서 될 일이 아니라면 잊는 게 좋습니다. 평생 눈물로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면 잊히는 게 좋습니다. 사람의 가슴에 담는 용량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사실 하나님도 망각을 지니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하면 접어두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 잊으시니 말입니다.

한 해가 다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 기억 속에 아프고 힘들고 화나고 어려웠던 순간을 접고, 그 속에 아름다웠던 순간을 넣어 세월 속에 미소 짓게 합시다. 잊히는 것은 잃어버린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란 어디에 그것을 두었는지 모르는 것이나 잊은 것은 세월에 흘려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과거는 부도난 수표일진대 아픈 기억을 붙잡고 어떻게 밝은 미래를 꿈꾸겠습니까? 좋은 것만 기억하기도 벅찬 세월입니다. 좋은 것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새해를 다시 써봅시다. 2025년, 전대미문의 기적이 우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옹달샘 중에서

생명의 말씀

선악과 없는 종교

인간은 입으로 들어가는 육의 양식과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지는 영의 양식을 동시에 먹고 사는 존재이다. 자동차를 보면 휘발유와 엔진오일을 넣을 곳이 각각 따로 있다. 휘발유 넣을 곳에는 휘발유를 넣어주고, 엔진오일을 넣을 곳에는 엔진오일을 넣어주어야만 자동차는 제대로 움직이게 된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자동차는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육신은 떡을,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만 한다(마4:4). 이는 인간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계획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영이 그 말씀을 먹는 것이다. 우리 영은 하나님 말씀으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특별히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인간은 그 자유의지로 선악과 없는 종교를 원하고 있다.

선악과 없는 종교란? 하나님 눈치 안 보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매우 환상적이며 인기 있는 종교다. “신이시여! 나에게 요구는 하지 마시오! 그러나 내 요구는 다 응답하소서!” 선악과 없는 종교의 신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인간의 저의는 간단하다. 그 우상들은 하라 말라 하지 않으니까 편하다. 인간이 아쉬우면 가서 복을 요구하고, 위로를 받는다. ‘선악과’가 없다. 하나님을 왕으로 거부한 인류 역사는 하나님 대신 필요를 따라 신을 창조했다. 그들이 창조한 신들로 수많은 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문제는 선악과 없는 종교가 세상에만 있는 것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선악과 없는 신앙생활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하나님께 복은 받으려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부담스러워한다. 타락이란 인간이 하나님같이 되려 하는 행위를 말한다. 곧 자기 의지를 자기 임의대로 쓰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 인간은 슬픔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가?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주신 엄청난 축복을 인간 스스로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요, 주인임을 알리는 안전장치다.

임택함 목사

동행하는 삶

하나님 자녀의 권세, 예수 이름!

얼마 전 허리가 아파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허리 신경이 눌린 것 같다 하여 주사 치료를 권유받아 대기하고 있는데 긴장되고 떨렸다. 그런 긴장되는 순간이 오면 나는 자동적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천군 천사는 나를 지키고 보호하고 도울지어다!”라고 명한다. 침대에 누워 바늘이 허리를 찌를 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약이 들어갑니다.”라고 할 때도 ‘예수 이름으로 통증이 있는 곳에 정확하게 약이 들어가 정상적으로 돌아올지어다!’라고 마음속으로 수십 번 외친다.

총회장 목사님께 배운 대로 예수 이름의 권세를,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주신 권세를 잘 사용하고 있다. 일단 어딘가 아프면 그 부위에 손을 얹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통증은 사라지고 정상적으로 돌아올지어다.”라고 외치며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누리려고 노력한다.

지인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언니가 있는데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불안과 긴장과 걱정이 많다. 그 언니에게 시시때때로 “언니! 교회 다녀 봐요, 예수님 믿어봐요. 그러면 단잠을 자게 될 거예요.”라고 말한다. 몸이 아플 때나 힘들 때 누워있으면 아이들이 다가와 “엄마, 기도해드릴까요?” 하고는 내 몸에 손을 얹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며 기도해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몸에 힘이 나기 시작한다.

살다 보면 걱정되는 일들과 고민, 긴장이 연속되기는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믿기에 기도할 수 있고 예수 이름으로 명할 수 있다. 그러면 마음속에 모든 걱정 근심은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온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고 권세이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이 나온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었으나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이름으로 명하자 일어서게 되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라고 베드로가 명하자 앉은뱅이의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가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 앉은뱅이는 몇 푼의 돈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돈은 없지만 내가 가진 것을 주겠다.’ 하고 예수 이름으로 명하여 그를 일으켜 세웠다. 평생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그는 걷는 연습이나 재활훈련도 없이 즉시 일어나 걷고 뛰었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에게 주신 권세이자 힘이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를 도와주고 보호하며 능력을 준다. 우리가 힘들 때 단순히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권세가 있는 이름으로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마음껏 누리게 해주신다. 구원의 이름이자 능력의 이름,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다. 병과 가난과 고통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 이름의 권세를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예수를 알고 믿고 사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자 감사한 선물이다.

2024년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마음껏 누리자!’는 표어대로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누려 행복과 감사가 넘치는 2024년으로 마무리되기를 소망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그것을 행하리니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그것을 행하리라”(요14:13~14).

정효경 집사

주님을 향한 노래

본이 됩시다

많은 교육법 중에도 효과가 좋은 방법은 시범(示範)입니다. 교육할 내용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죠.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오감을 통해서 한번 체험하는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 좋은 교육이 됩니다.

일례로 예수님께서는 ‘섬김’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겨주셨습니다. 발을 씻기는 행위는 집안의 낮은 하인이 할 일인데, 가장 높으신 스승이 그 일을 했으니 제자들의 충격이 적잖았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 예수님은 직접 본을 보여주시는 교육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엘리베이터에 아들과 같이 탈 때면 모르는 어른들이 먼저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아이에게 “안녕하세요, 해야지~”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그냥 빤히 쳐다만 보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인사를 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게만 인사를 시키는 게 조금씩 멋쩍게 느껴졌습니다. 생각해보니 먼저 인사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준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다음부터 아이를 데리고 경비실 앞을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어느 날부터는 경비실 앞을 지날 때 아이가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경비실에 아무도 없어도 말입니다. 이제는 길을 가다가도 처음 보는 어른에게 먼저 인사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시대 목사님은 설교학 시간에, ‘설교는 강단에서 50%, 삶에서 50%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총회장 목사님의 설교가 더욱 힘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목사님이 전하는 말씀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에는 먼저 어머니를 찾아뵙고 같이 식사하고, 옷도 사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나서 효도에 대한 설교를 하셨다는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목사님을 따르는 우리도 내 가족과 친구, 더 나아가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이 돼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의 종들이 믿음의 본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듯이, 세상에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들의 마음 문을 열고 복음을 전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본이 된 것을 크게 기뻐했습니다(살전1:7). 우리도 내가 속한 곳에서 본이 되는 삶을 산다면, 목사님과 하나님의 큰 기쁨이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더욱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이호민 전도사

참된 깨달음

현실에 만족하지 않을 결심

우리 가정에 소중한 셋째 자녀를 주셨을 때, 2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섯 식구가 지낼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갈 마음을 먹고, 만삭의 아내와 함께 부동산에 갔습니다. 자녀들이 학교를 전학하지 않도록 같은 동네를 알아봤지만, 살던 집을 팔아도 1억 원은 더 있어야 30평대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대출을 받은 터라 경제적 여유도 없었고, 월급이 갑자기 오를 일도 없었기에 실망만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다 하계산상집회(2017)에 참석했는데, 첫째 날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

‘두려우면 현실에 만족하고 살아라!’였습니다. 설교를 듣는 동안 이사 갈 수 있다는 소망과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뉴스에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주택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부동산에 집을 내놓자마자 비싼 가격에 바로 팔렸습니다. 이제 이사 갈 30평대 집을 찾아야 하는데, 최소 6천만 원이 필요했습니다.

어느 날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는데, 앞동 로열층에 시세에 비해 4천만 원이나 싼 매물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당장 집을 보려고 했더니 세입자가 이런저런 핑계로 집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기도 중에 계약하라는 감동이 와서 집을 보지도 않고 집주인에게 그날로 가계약금을 넣었습니다. 가계약은 했지만, 집값은 계속 오르고 있었기에 집주인이 마음을 바꾸지 않도록 7일간 여리고를 돌기로 했습니다. 새벽에는 만삭의 아내가, 낮에는 어머니가, 저녁에는 퇴근한 제가 각각 “예수 이름으로 이 집은 내 것이 될지어다!”를 외치며 아파트를 돌았습니다. 잔금을 치르던 날 오전에는 살던 집을 매도하고, 오후에는 무사히 꿈꾸던 30평대 아파트에 입주했습니다. 같은 단지 9층 20평대를 팔아서 22층 30평대로 이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만족하지 않을 결심을 하면 하나님은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경험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송명국 집사

1283호 다른 글

커버스토리
Text 주일설교
지혜의 말씀
붕우칼럼
객원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