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있는 신앙으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신앙이다. 신앙생활에 보다 열심을 내지 않는 이유는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1,600년 동안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 시대순이나 사건 순 등의 일정한 순서로 연결되지 않는데, 이는 각자 체험한 사실을 써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말씀을 그대로 믿기만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그대로 역사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낙심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할아버지가 입대했던 군대에 아버지가 입대하고 후에 다시 아들이 입대한다. 사람은 바뀌고 지나가도 군대는 언제나 막강하게 존재한다. 이와같이 어느 시대에 사는 성도이건 마귀를 멸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항상 있어야 한다.
귀신을 박멸하는 것은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다.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루신 일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남은 작업으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세상 지식 있는 자들이 교회에 모이면 믿음보다는 예수의 이름을 빙자해서 문화적인 모임만을 갖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름을 빌려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그런 자들이 모인 교회에는 아무리 믿음을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저 사회에서 화젯거리가 되는 시사 문제나 정치 문제를 말하면 귀가 솔깃해진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자들이 모인 교회는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단체가 되고 만다.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해서 사회운동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야 할 강단은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연설의 목소리만 높아갈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다. 주의 뜻대로 사는 자들은 그분으로부터 떠날 수가 없다. 마음에 접근해오는 어떤 유혹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을 이간시키거나 배신하게 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기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다(롬8:35~39). 우리는 주님을 향해 갈 것인지, 아니면 자기 뜻대로 갈 것인지를 잘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사는 것도 주를 위해 살기로 작정해야 하고, 죽는 것도 주를 위해 죽기로 작정해야 한다.
복음은 착한 행실을 강요하는 교훈이 아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로 매일매일 이기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이 땅에서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주님과 더 나은 관계가 되어야 한다. 뜻을 정하여 가다 흔들리지 말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