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는 것을 다 주시는 하나님
구하는 것을 다 주시는 하나님
신앙생활은 주님과 동행하며 기쁨으로 가는 길입니다. 성령을 받은 하나님 의 자녀들이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아버지께서 주시고, 그로 인해 우리에게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6:24). 하나님께 구하고 응답받는 기도 의 기쁨은 누려본 자만이 그 맛을 알 것 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조용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 기도는 듣고 계시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분이 살아계시고 지금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면 ‘이렇게까지 응답이 안 올 리가 없는데…’ 하며 조급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과 다르며 (벧후3:8),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사 55:8).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 기도를 들으시며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코로나가 어느새 지나고 종교행사도 인원 제한이 풀려서 처음으로 총동원을 했던 주일이었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교단 전체의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예배에 힘을 모았습니다. 저도 맡은 교구에서 목표를 세우고, 성도님들을 독려하며 금식하고, 철야기도도 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드디어 주일날 아침 교구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 분, 한 분이 타실 때마다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목표했던 인원이 다 타지 못한 채로 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에 얼마나 낙심이 되던지요. 하나님 앞에 특별히 죄지은 것도 없는 것 같고, 내 정욕대로 구한 것 같지도 않은데, 어제까지 금식하고 철야하며 기도했던 것들을 생각하니 낙심이 안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역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었습니다. 교회에 도착하니 제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이 교회에 이미 와있었습니다. 저는 세웠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제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 찬양을 하는데 눈물이 흘러 도저히 찬양을 할 수 없었습니다. 408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찬송을 부르는데, 내 안에 성령님께서 “너는 이미 내 은혜의 바닷속에 들어와 있다.”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며 저를 위로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사랑하시던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가족입니다. 어느 날 나사로는 죽을병에 걸리게 되고, 그 누이들은 예수님께 그 소식을 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결국 나사로가 죽은 뒤에야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가셨고,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요11:21).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많은 무리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려는 예수님의 크신 뜻을 마르다는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마르다가 기대했던 것보다 예수님이 너무 늦게 왔을 뿐이었죠. 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에서 마르다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고백이 나옵니다. 우리도 때때로 마르다처럼 주님을 향해 원망 섞인 투정을 부릴지 모르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만은 흔들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11:22).
이호민 전도사
fioe154@naver.com
틀
요즘 사춘기에 접어든 첫째 아이와 서로 부딪치는 일이 잦아졌다. 최근에는 머리 깎기를 싫어하여 미용실에 간 지 3개월이 넘어서게 되었다. 머털도사 수준으로 더는 아니다 싶어 미용실에 데리고 가서, 앞머리, 옆머리, 뒷머리 모두 깔끔하게 깎아달라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인상을 쓰며 앞머리는 깎지 않는다 거부하였고, 미용사를 사이에 두고 나와 실랑이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순간 열불이 나서 마음속으로, ‘저거 미용실 나가자마자 머리통을 세게 한 대 때려줄까.’, ‘아빠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오은영 박사님 훈육 방식이고 뭐고, 그냥 한번 무섭게 잡아버려?’ 생각하며 그 상황을 상상했다. 그런데 문득, 매섭게 혼내고 난 후 누군가 내게 “아이를 왜 그렇게 혼내고 때렸어요?”라고 물으면 나는 무엇이라 말하지? “내가 원하 는 머리 스타일대로 하지 않아서요.”라고 답변한다면 그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이유로 화가 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혹시 아이가 주관이 생기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일까? 아이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내 틀에만 맞추기를 바라는데, 거부하니 화가 나는 것이구나.’라고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과의 갈등은 자기의 틀만을 고집해서인 것은 아닐까? 심지어 교회도 내 틀에 맞추려 하고, 하나님의 기도 응답마저도 내 틀에 맞춰달라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이 깊어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넓어지는 마음속 여유를 바라는데, 왜 고집은 세어지고, 감정은 더 예민해지는 건지. 깔끔해진 머리로 미용실을 나서는 아이를 보며 한결 마음이 나아졌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아까는 머리통을 왜 때려 주고 싶었을까?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박찬영 집사
cross35@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