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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9호 목차 › 교단소식

사랑의 동반자는 온유함이다

1259호 · 2024-06-23

“오래전 일이다. 모처럼 기도원에 쉬러 내려갔는데, 어느 권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내가 보고 싶단다. 이제 막 기도원에 내려왔는데, 다시 서울까지 올라가려니 솔직히 귀찮았다. 정말 쉬고 싶었다. 그래서 주말에 올라가서 찾아가겠다 하곤 기도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며칠 후 연락이 왔는데 아뿔싸! 그 권사님이 소천하셨다는 게 아닌가. 나는 그때 얼마나 가슴을 치며 후회했는지 모른다. 귀찮다는 이유로 권사님의 마지막 소원을 거절한 나를 책망하며 정말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그 후로 성도들의 일에 절대 귀찮아하지 않는다. 기도원집회 때 서너 시간 설교하고 내려와 젖은 옷을 갈아입지 못해도 성도들의 사연을 들어주고, 모든 전화나 문자에 가능한 한 꼭 답변해주고, 시간이 나는 대로 병원 심방을 간다.

우리 어머니는 일곱 남매를 두셨다. 어릴 때 두세 살 터울, 혹은 연년생인 일곱 자식이 젖을 물어뜯어도, 물어본 걸 다시 물어봐도,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해도 우리 어머니는 귀찮다고 하신 적이 없다. 사랑하는 내 자식이니까.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자식을 두셨는가? 그 많은 자식이 매일 울고불고해도, 매일 실수해서 뒤치다꺼리해도, 뭘 해달라고 졸라도 절대 귀찮아하시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여섯 번이나 묻고 물어도 일일이 답해주셨다. 아무리 부모라도 그렇게 자꾸 물으면 짜증 내며 ‘그만 귀찮게 해라.’ 할 텐데 우리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그렇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다.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고전13:4~7). 나는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 ‘사랑은 절대 귀찮아하지 않는 것이다.’

주의 종이 만일 성도들이 귀찮다면 그건 성도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하고, 귀신을 쫓고 능력을 행해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고전13:2~3). 그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목회란 양 떼를 돌보는 것일진대 양이 귀찮아서야 말이 되겠는가.

사랑의 동반자는 온유함이다. 사랑과 온유라는 부모 밑에서 평화와 자유라는 자식이 나온다. 온유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다. 어느 누가 차고 딱딱한 것을 좋아하겠느냐? 따뜻한 사람, 부드러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래서 형제를, 이웃을, 성도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고,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이다(요일4:7~8). 예수님도 사랑이시며 온유하신 분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8~29).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라면 서로 사랑해야 하며, 온유한 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특히 사도 바울은 주의 종들에게 온유한 자가 되라고 당부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2:24). 나도 여러분에게 당부한다. 온유한 종이 돼라. 학문만 가득해서 머리가 가분수처럼 커지지 말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목회자들이 돼라. 나는 늘 사랑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노력했다. 그랬더니 모세처럼,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사랑의 종이 되었다. 그것이 목회 성공의 비결이다.”

이것은 지난 6월 14일, 예수중심제자신학원 2024학년도 1학기 종강예배에서 교수진들과 신학도들에게 목사님이 설교하신 내용이다.

설교 후 교수진들과 신학도들이 함께 식사했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거야!’ 목사님 말씀에 모두가 ‘아멘’으로 화답했다.

또 새로운 시작을 위해 다 같이 힘차게 뛰어보자. 할렐루야!

신묘수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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