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없는 영광은 없다
복음 전도의 사명은 멈출 수 없다(2024 전주실내체육관 집회 광경)
교회는 핍박이 거셀 때 더 부흥 성장한다. 초대교회의 부흥이 그러했고, 한국 교회도 핍박과 순교를 넘어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다. 우리 교회의 부흥과 성장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적으로도 대내외의 도전이 거셀 때 더욱 결집하고 성장동력이 극대화되는 것을 본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결집을 강화하고 조직이나 단체의 힘을 더 공고하게 하는 동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고보나 베드로 사도 모두 우리에게 오는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 가르치지 않는가? 목사님도 ‘거센 파도가 유능한 해군을 만든다’고 누누이 강조하신다.
이번 전주실내체육관 집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집회 참석을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일당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려는 내용이 지역 기독교 방송에 보도되며 약간의 파장이 있었다. 이를 두고 마치 교회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려 한다는 식의 비판이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몰상식이다.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며 범하는 오류 중의 하나가 자꾸 인간의 생각으로, 상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통로를 통해 이루어질지 알 수 없다.
누가복음 14장 16절 이하에 보면 잔치에 초청받은 자들이 참석을 거부하자 노한 집주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리를 채우라고 종들에게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 인간이 보기에 멋진 방식으로 진행될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문제는 인간의 논리란 잣대로 하나님을 재단하려는 무지와 무도함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리하신다는데 피조물인 인간이 어찌 힐문할 수 있단 말인가.
2014년 서울시청광장에서 평화통일 기도성회를 추진할 때, SNS를 통해 이런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교회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은 때에 굳이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이 온당치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때 이렇게 답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더욱 교회가 교회 본연의 사명을 다해야 하지 않는가? 세상이 뭐라 한다고 교회가 주눅이 들어 잠잠해야 한다면 누구 좋으라는 것인가?’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교회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아서는 안 되겠지만, 교회 본연의 사명, 곧 예배와 선교사역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성경이 응하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일이 있을 때 움츠러들고 두려워하는 교회는 죽은 교회다. 살아있는, 생명력 있는 교회라면 더욱 기뻐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지상 최대의 명령을 최선을 다해, 사도들처럼, 목사님처럼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복음을 전하러 베네수엘라(Venezuela)로 떠난다. 전도자 선다씽의 말처럼,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목사님의 40년 목회 역시 이러한 항구여일한 자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단의 괴수라며 교계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으셨지만, 목사님은 단 한 번도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진 적이 없으셨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도 바울처럼 목숨조차 하나님께 바친다는 각오로 전도의 사명을 묵묵히 수행해오셨다. 그 복음의 열매가 오늘날 전 세계 70여 개국에 주렁주렁 열려 오늘의 예수중심교단을 이룬 것이다.
70 중반의 연세에 이틀간의 전주실내체육관 집회에 혼신을 다하시는 목사님을 보니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신 게 없다. 주군의 명령을 받은 신하가 죽을 때까지 그 명령을 받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 우리 모두 목사님을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삶에 최선을 다하자. 현재 우리가 받는 고난은 장차 그날에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