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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

1251호 · 2024-04-28
오늘의 메시지

할 수 있다

나폴레옹 군대가 패배 직전의 전쟁에서 북 치는 소년을 향해 소리친다.

“퇴각 북을 울려라!”

하지만 북 치는 소년은 나폴레옹에게 말했다.

“장군님! 저는 당신으로부터 한 번도 퇴각 북 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로지 돌격 북만을 칠 수 있습니다.”

소년의 말에 깨달은 나폴레옹은 즉시 명령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돌격 북을 울리도록 하라.”

결국 나폴레옹과 군사들은 다시 힘을 얻어 패배의 수렁에 빠진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 같지 않은가!!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한 겨자씨만큼만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우리가 못 할 것이 없다”고 하신다(마17:20).

안 하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믿는 자는 못 할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결국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 틀림없다. ‘할 수 있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본다면 능치 못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자.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라. 주님은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통해 말씀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이기게 되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하셨다.

진정 복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임을 기억하자.

김상욱 목사

ksw9669@hanmail.net

낮은 울타리

나를 살린 주 보혈

최근 큰 문제가 닥쳐왔습니다. 당장 생계와 연관된 문제라 그 문제가 저에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 고난을 헤쳐 나가기 위해 직분자로서 자리를 지키고, 새벽기도를 하고, 하나님 말씀에 더욱 집중하며 문제에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약해진 제 마음을 더 흔들기 시작했고, 저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했습니다.

찬양과 기도를 드릴 때 뜨겁던 제 마음은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머리로는 이 고난이 축복이고, 주님의 큰 계획임을 아는데 성령의 불이 꺼져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많은 찬양들을 들었습니다. 일부러 찬양 가사에 내 문제에 공감하시고, 응답해주시고, 나를 일으켜주실 거라고 적혀있는 찬양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모든 가사들이 저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 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갔는데 예배 때 홀리 워십에서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찬양에 놀랍게도 그전까지 냉랭하던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울린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저는 저를 살릴 찬양은 절 위로하는 가사의 찬양일 줄 알았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약속을 주시는, 날 일으키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을 뜨겁게 한 것은 바로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보혈로 나를 자유케 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전 문제를 만난 후 계속 다시 일어날 저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제가 예수님께 받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찬양을 통해 저는 제가 이 고난을 통해 받아야 할 것보다, 제 상황과 상관없이 이미 저에게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날 위해 다 내어주신 예수님이 제 마음에 들어오면서 내가 위로받지 않아도 괜찮아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보혈 자체가 이미 저를 살렸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왔다면, 야곱이 다 내려놓고 벧엘로 올라가 주님을 만났던 것처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 돌아가 봅시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장수정

내가 매일 기쁘게

군맹무상(群盲撫象)

얼마 전, 내가 속해 있는 공공기관은 행사 개최를 위해 대형 기획사와 함께 일하였다. 대형 행사는 허가 조건이 까다로워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기획사는 시(市)의 유력자를 통하여 철저히 준비한다는 조건 아래 이례적으로 먼저 허가를 받아내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인맥(간접자본)을 잘 활용한 사례이다.

그러나 기획사는 모든 일을 인맥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행사를 돕기 위해 모인 공무원들을 하수인 취급하고, 언사를 무례히 행했다. 화가 난 공무원들은 협의를 파기하고, 조건을 갖추지 않을 시 허가를 철회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맥을 통해 찍어누르고 불화를 일으키는 상황을 보며,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인맥을 활용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 고민하였다. 한 템포 쉬고, 목사님의 이전 설교들을 복기하였다.

‘인맥(간접자본)은 성공의 인프라’일 뿐 아니라,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관원)에게 칭찬을 받으리라”(롬13:3), “철저하게 성공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설교를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목사님께서 예전에 잠실학생체육관 임대를 위해 청와대 고위 관료와의 인맥으로 해결하려 하셨다가 체육관 실무자들의 반대로 계획이 무산되었었다는 간증을 하신 적 있다. 그 후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시게 되었다는 말씀이었지만, 이번 건과 비교해볼 때 기획사가 저지른 실수 역시 마찬가지란 생각이다.

기획사는 인맥은 잘 활용하였지만 고위층만 향한 편향된 인맥 관리로 철저히 준비하지 못하였고, 돕는 자들을 무례한 태도로 대하며 사업을 그르칠 상황에 부닥치도록 한 것이었다. 기획사 대표는 그 자리에서 사과하며 행사를 도와줄 것을 간절히 읍소하였다. 그러자 공무원들은 허가 조건을 갖추기 위한 방법을 기획사 담당자에게 알려주었고, 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군맹무상(群盲撫象)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란 속담과 같은 의미로 좁은 소견 또는 식견으로 잘못 판단한다는 뜻이다. 순간의 감정과 분위기 때문에 성경과 설교를 단편적으로 바라보는 오류를 저질러선 안 된다.

삶과 신앙은 단편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다. 다양한 방향에서 바라봐야 한다. 목사님의 설교도 단편적으로 듣지 말고 여러 설교들을 두루 살펴보자. 거기에 반드시 답이 있다.

전호정 집사

프롬 인터넷

소실대득(小失大得)

미국의 어느 작은 슈퍼마켓이 갑자기 정전으로 불이 꺼졌습니다. 그 슈퍼는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계산기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언제 다시 전기가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어둠 속에서 계산을 기다리던 손님들이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슈퍼마켓 직원이 이렇게 안내 방송을 했습니다. 

“정전으로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전기가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바구니에 담은 물건은 그냥 집으로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그 값은 여러분이 원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해주십시오. 모두 안전하게 나갈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조심해서 따라오십시오.”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돈보다 손님의 안전을 먼저 생각한 직원의 조치에 대하여 언론 매체들의 칭찬이 잇따랐습니다. 

얼마 뒤, 슈퍼마켓 본사 감사팀이 그곳으로 조사차 나왔습니다. 그날 나간 상품 금액은 대략 4천 달러였습니다. 그런데, 일주일간 언론에 노출된 회사의 긍정적인 이미지로 인해서 얻은 광고효과는 40만 달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주님을 향한 노래

십자가의 도

충북 제천에 있는 세계기독교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박물관 내부에는 양피지에 수기로 기록된 두루마리 성경부터 무교병과 유교병, 비파와 수금 등 성경에 나오는 각종 물품과 악기, 의복 등이 있었고, 외부에는 이스라엘 지형을 5,000분의 1로 축소하여 꾸민 야외 정원에서 떨기나무, 올리브나무, 우슬초 등 글자로만 보았던 나무와 풀들을 실제로 볼 수 있었습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관람을 했는데 한 가지 설명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슨, 2천 년 전 나사렛에서 난 예수는 자신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아니며, 오히려 이단의 괴수로 여겨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또한 훗날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경멸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물관에서 본 구급함에는 십자 표시 대신 다윗의 별 문양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또 수학 시간에 볼 수 있는 덧셈 기호(+)도 십자 모양을 닮았다는 이유로 세로줄을 반만 그려서 표시한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처럼 반감을 품을지도 모릅니다. 그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우리 역시 그들의 눈에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갈릴리 마을에 혜성처럼 나타난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좇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주변 사람들은 미련하다 여겼을지 모릅니다.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환경에서 편히 살 수 있었던 총회장 목사님이 예수님을 만나고 전 재산을 팔아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 눈에는 미련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예배니, 기도회니, 모임이니 매일 같이 교회로 달려가고, 월급의 10%를 십일조라고 내며, 내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드리면서 봉사하는 것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영생을 준비합니다.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도 주며, 오리를 가자 하면 십 리를 가주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 노력하는 우리들을 세상 사람들은 미련하다 손가락질할지라도 그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십자가의 도를 좇아 살아갈 때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우리 삶에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흉악한 죄인을 처형하는 형틀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진실로 감사합니다.

이호민 전도사

진리에 이르는 지식

루터의 종교 개혁(2)

1517년 어느 날, 요한 테첼이란 순회 설교자가 그를 호위하는 무장군대를 거느리고 독일에 나타나 교황청과 교황 레오 10세의 문장을 앞세워 당당히 행진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은 후 면죄부를 사라고 외쳤다. “금화가 헌금 궤에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순간 당신들의 영혼은 연옥에 가지 않고 하늘나라에 간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의 신앙은 면죄부 판매를 찬성할 수 없었다. 1517년 10월 31일, 간밤에 루터는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교회 정문에 내걸었다. 교황청은 1520년 6월 15일 ‘주여 일어나소서.’라는 교서로 루터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기독교인의 최종 권위는 단연 성경이라 주장하였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번잡스러운 스콜라 신학이나 성 유물, 마리아 숭배에서 나오지 않고, 또한 로마 교황이나 교회 회의가 교회의 최종 권위는 더욱 아님을 굽히지 않았다. 교황이나 교회 회의도 인간의 주장이기에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루터의 ‘오직 성경’이란 말은 지금까지 꾸준히 지속되어 오던 교회사의 전통을 모두 부정하는 말이 결코 아니었다. 루터는 성경에 직접적이고 분명한 가르침이 없는 경우에는 교회의 전통을 따르고자 했다. 루터는 ‘오직 믿음과 은혜’로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의 성례 전에 기초한 죄 사함, 행위 구원, 면죄부에 의한 죄의 경감이나 구원, 신부를 통해 죄의 고백을 하기 위한 고해성사와 같은 무겁고 부담스러운 과정을 단숨에 제거해버린 인류 역사의 대(大)자유헌장과 같은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오직 믿음과 은혜’의 헌장을 선포한 루터였다. 그러나 믿음과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분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 받음을 강조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대목이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예수님보다 중요하게 신봉하므로 예수님은 항상 어린아이로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든지 아니면 십자가에 죽어있는 모습을 부각시킨다. 루터가 천주교의 대개혁을 주장한 것은 잘한 것이다. 오직 믿음과 은혜로 구원 얻음을 주장하며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게 한 것은 참으로 잘한 것이다.

이승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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