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꾸는 말의 힘
인생을 바꾸는 말의 힘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의 말이 우리의 삶과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나사로를 말씀 한마디로 살리신 예수님의 말을 연구해보면 몸의 세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권세가 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은 ‘말씀(로고스)’으로 존재하셨다고 소개한다, 하나님은 ‘말’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말’은 곧 하나님 자신이라고 표현하셨다. 결국 말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하나님의 본체에 속한 것이었다(요1:1).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의 권세를 혼자 가지고 계시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사람에게 이 말의 권세를 주셨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용하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있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말 한마디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우리의 자화상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이나 경력보다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말을 듣고 성장했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자화상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부정적인 자화상이 만들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 10명의 말을 듣고 원망하고 불평했을 때 그들이 말한 대로(민14:28) 40년 광야생활을 통해 그 값을 치르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말을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복을 누렸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말을 날마다 듣고 계신다. 그리고 그 말에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다.
말의 영향력을 알았던 솔로몬 왕은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6:2)고 말한다. 우리 말이 우리 행동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심코 내뱉었던 말 한마디가 내 삶을 묶기도 하고 회복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인정하는 말, 격려하고 칭찬하는 말, 감사하는 말로 행복한 삶을 설계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이정금 전도사
상어가 나타났다
영국 사람들은 청어를 좋아한다. 그래서 청어가 비싼 값에 매매되는데, 살아있는 청어라면 당연히 더 값을 잘 쳐준다. 그래서 상인들은 청어를 살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써봤지만, 이것들이 성질이 급해 금방 죽어버리고, 오래 차를 타면 어지럼증으로 비실비실하기 일쑤다.
그러자 한 상인이 머리를 썼다. 청어를 담은 물탱크 안에 작은 상어 한 마리를 같이 넣은 거다. 상어가 청어를 먹어봐야 몇 마리나 먹겠는가. 그런데 청어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위기다. 그래서 죽어라 도망치느라 성질부릴 사이도, 멀미할 틈도 없어 끝까지 살아있었다.
살다 보면 상어 같은 문제와 사람, 상황과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다.
해외집회를 다니다 보면 정말 숱한 위기 상황에 봉착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낭떠러지인 줄 알았다. 그래서 발버둥 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돌이켜보니 위기가 나를 강하게 했고, 위기 대처능력을 갖게 했고, 분별력을 갖게 했고,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했다. 그 위기는 내게 상어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24:10).
위기는 동아줄 같은 것이다. 그 동아줄을 보고 이것이 목을 매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실패자요, 그것을 잡고 탈출을 시도하는 자는 성공자다.
아스팔트로 된 곧은 길만 계속 달려봐라. 그것은 인생에 멀미를 일으킬 것이다. 위기라고 무서워 말고 그것에 대응하는 자가 돼라. 상어가 나타났는가? 위기가 왔는가?
그것은 또 다른 기회가 온 것임을 직감하라.
이초석 목사 저서 ‘뿌리가 썩은 나무에
물을 주지 말라’ 중에서
항상 동행해주시는 친구
인생길을 홀로 걷기보다는 든든한 누군가가 내 곁에서 동행한다면 힘있게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잠깐 동행할 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아니하신다 약속하셨다(히13:5). 이 말씀보다 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이 어디 있을까?
우리가 말씀을 거역하고, 때로는 배신할 줄도 뻔히 아시면서도 ‘너는 내 친구’라고 속삭이신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다. 세상 친구는 나를 배반하고 버릴지라도 주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내가 속이면 그냥 들어주고 참아주신다. 배반할지라도 책망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으신다.
항상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너무 느려. 나는 이 습관을 왜 버리지 못하는지, 나는 정말 한심해.” 물론 누구나 자기 인생에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하나님은 아직 우리를 완성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가치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 하나님이 붓을 꺼내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을 지우시고 “저놈은 어쩔 수 없군.” 하실까? 천만에!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며 다시 기회를 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실망을 시켜드려도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가치는 항상 처음과 똑같다.
내가 당신에게 빳빳한 지폐를 주면 받겠는가? 싫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내가 그 지폐를 구겨서 아주 지저분하게 만들었다고 하자. 이런 지폐라도 받을 생각이 있는가? 당연하다. 내가 그 지폐를 가져가 땅바닥에 던지고 그림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밟았어도 받겠는가? 물론이다. 왜일까? 아무리 지저분하게 만들었어도 여전히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지폐는 여전히 그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이 돈처럼 보신다. 우리는 누구나 난관에 부딪히고 시련을 겪는다. 때로는 구겨지고 더러워진 지폐 같은 심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폐가 여전히 가치 있듯이, 우리도 여전히 소중한 존재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치를 주셨으니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임택함 목사
여덟 명의 자식과 한 명의 애인
엄마가 57세에 혼자가 되어버렸다.
나의 이혼소식에 쓰러진 아버진 끝내 돌아오지 못하셨고, 그렇게 현명하셨던 엄마는 정신이 반 나간 아줌마가 되어 큰오빠, 작은오빠 눈치보기 바빴다.
이제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는 큰오빠 말에 그 큰집을 팔아 큰오빠에게 다 맡겼고, 나 몰라라 하는 큰오빠 때문에 작은오빠의 모든 원망을 다 감수해야 했다.
사이 좋았던 팔 남매가 큰오빠 때문에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엄마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고, 노름하는 아들한테조차 할 말을 못하는 딱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걸 이해하는 난 엄마가 원하는 대로 형제들에게 돈을 풀어주었고, 그런 나에게 미안했던 엄마는 가끔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널 낳지 않았으면 난 어떡할 뻔했니?”
“괜찮아, 엄마. 엄마는 우리 여덞 잘 키웠구 큰오빠가 지금 자리잡느라고 힘들어서 그렇지, 효자잖어. 이젠 새끼 걱정 그만하고 애인이나 만들어서 즐기고 살어!”
“애인은 안 돼. 네 아빠같은 남자가 없어.”
그러던 엄마가 어느 날 나에게 슬그머니 말씀하셨다.
“남자친구가 생겼어. 작년 해운대 바닷가 갔다가 만났는데 괜찮은 거 같아서 가끔 같이 등산 간단다.”
“어쩐지…. 자꾸 등산을 가더라. 뭐하는 분인데?”
“개인병원 의사인데 사별했대.”
“이번 엄마 환갑 때 초대해 봐. 내가 언니 오빠들한테 말해놓으께.”
우린 엄마 생신 때 호텔 연회장을 하나 빌렸고, 엄마 지인들과 여고 동창들을 다 초대했다. 그리고 그 아저씨도….
엄마 남자친구는 멋졌다. 그리고 어울렸고 아버지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겨 더 좋았다.
“그 집 아들들이 재혼을 원한다는데 어쩌지? 혼자 계시는 아버지가 좀 그렇다네.”
모두들 찬성이었다. 그런데 작은오빠가 길길이 뛰기 시작했다.
“안돼 엄마. 그런 게 어딨어? 우리 불쌍한 아버진 어쩌라구! 이 나이에도 남자가 필요해? 우리 자식 보며 살면 안돼? 창피해! 형은 장남이 돼가지고 엄마 모시기 싫어서 그래? 내가 모실 테니 걱정마. 그러면 아버지 제사 땐 어쩔 건데? 엄마! 아직 난 엄마가 필요하다구!!”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미친놈이 보기 싫어 형제들은 다 가버렸고, 소리 지르며 욕을 퍼붓는 나를 엄마가 막으셨다.
“그만해라, 없었던 일로 하마.”
그리고 다음 해! 어느 날 술이 잔뜩 취해 올케와 싸웠다고 작은오빠가 전화가 오고, 가지 말라고 말리는 나를 뒤로 하고 간 엄마는 다음날 병원 응급실에서 만났다. 새벽에 얼까 봐 수돗물을 틀어놓으러 나오셨다가 쓰러져 뒤늦게 발견된 엄마!
우리 자식들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혼수상태의 엄마를 처음엔 매일 붙어있었지만 시간이 좀 흐르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슬슬 볼일들을 보기 시작했고, 면회시간을 꼭 지켜 기다리고 있는 건 병원을 맡기고 온 원장님뿐이었다. 우린 깨어나지 않는 엄마를 기다릴 뿐이었는데 원장님은 엄마를 주무르며 계속 속삭였다.
“박 여사, 일어나요. 우리 전에 시장 가서 먹었던 선지국밥! 그거 또 먹으러 갑시다. 내가 사준 원피스도 빨리 입어봐야지!”
병원에서 그 원장님은 우리 형제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이제 병원에서 해줄 것은 없습니다. 퇴원하셔야 됩니다.”
평생 식물인간이라는 판정과 함께 어디로 모셔갈 건지를 정해줘야 차로 모셔다 준다는 말에 모두들 헉!
큰올케가 먼저 말했다. 자신은 환자를 집에 모시는 건 못한다고. 둘째 오빠가 말했다. 맞벌이라 안 된다고. 장가도 안 간 스물여덟 살 막냇동생은 울기만 한다. 딸들 표정은 당연히 큰오빠가 해야지 본인들 하곤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오빠들은 ‘그동안 네가 모셨으니 계속하면 안될까?’ 하는 표정으로 날 본다. 난 결국 내 짐인 줄은 알지만 그런 형제들 꼴을 쳐다보고 있는데, “저~ 제가 감히 한마디 해도 되나요?” 언제 오셨는지 우리 곁으로 오신 원장님.
“제가 그때 박 여사와 재혼을 말했을 때 박 여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아직 우리 애들한텐 엄마가 필요한가 봐요. 자식들이 내가 필요 없다 하면 그때 갈게요’ 라고 했어요. 지금도 엄마가 필요하세요? 난 저렇게 누워있는 사람이라도 숨만 쉬고 있는 박 여사가 필요합니다. 나한테 맡겨주세요. 내 병원이 박 여사한텐 더 편할 겁니다.”
작은오빠가 통곡을 했다. 다른 형제들이 울기 시작했다. 결국 엄마는 퇴원을 못하고 돌아가셨다.
모두 저마다 믿는 신에게 기도했겠지만 난 엄마에게 부탁했다.
“엄마! 엄마의 이뻤던 모습만 보고 먼저 간 아버지는 잊고 엄마의 추한 병든 모습까지도 사랑한 이 원장님만 기억하고 가, 엄마! 엄마는 팔 남매 키운 공은 못 보고 가셨지만 여자로 사랑만큼은 멋있었어.”
67세에 우리 엄마는 그 가슴 졸이며 평생 키운 팔 남매가 아닌 몇 년 만난 남자의 손을 잡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자식이 식물인간이 돼 있다면 부모는 무엇을 이유로 댈까. 우리 팔 남매는 엄마를 모셔가지 못할 이유가 다 있었다. 더 끔찍한 것은 나도 그 입장이라면 그런 핑계를 대지 않았을까? 이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한테 묻고 싶다.
“엄마~ 또 다시 새 인생을 준다면 팔 남매 낳을 거야?”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2~3).
예수님도 속았느냐?
용문산 기도원에 김기동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이 오신다는 광고를 보고 3박 4일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무실에 접수를 하고 방을 배정받아 들어갔다. 6, 7명의 목사님들과 통성명을 하게 되었는데 나도 악수를 하며 교단과 교회를 말했다.‘이초석 목사님의 예루살렘교단 포항예루살렘교회 담임 이승효입니다.’라고 하자 다들 악수를 거절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이단 졸개가 왔다 싶었는지 상종을 하지 않았다.
집회 시간과 밥 먹는 시간 외에는 방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드러누웠고, 나는 베게 위에 성경책을 올려놓고 말씀을 읽었다. 마지막 날 한 사람이 나에게 ‘목사님은 방에 들어오기만 하면 성경을 읽느냐?’며 말을 걸었다. 나는 그에게 이단이라고 악수도 안 하고 말도 안 하는데 성경이나 봐야지 뭐하냐?’고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들은 우리를 이단 취급하는데 우리가 이단이면 당신들은 사단’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귀신 쫓으라 하셔서 우리는 귀신 쫓는데 당신들은 안 쫓지 않느냐? 시키는 대로 해서 이단이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사단이지 뭐냐? 그리고 불신자의 사후 존재가 귀신이라고 성경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당신들은 마귀가 귀신으로 가장한다고 하는데 그 말씀이 성경에 어디 있느냐?’며 성경을 계속 주장했다.
‘천사가 하나님처럼 되려다 하늘에서 쫓겨나 마귀가 되었고 마귀는 천사가 변질된 것이며 죽을 수 없는 존재이고 귀신은 죽은 자다. 제사는 귀신에게 하고(고전10:20), 귀신은 죽은 자다(시106:28). 점은 귀신이 하고(행16:16), 점하는 귀신은 죽은 자다(사8:19). 당신들의 말대로 마귀가 죽은 사람으로 가장하여 속인다면 예수님도 속았느냐? 마귀가 죽은 자로 가장한 것을 모르고 예수님이 ‘귀신아, 나가라’ 하셨으니 예수님도 마귀에게 속은 것 아니냐? 예수님이 ‘마귀야, 나가라’ 하셨어야 속지 않는 것 아니냐? 그리고 당신들은 왜 불신자의 사후 존재 귀신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었느냐?’며 몰아세웠다. 쥐 죽은 듯이 가만히 듣던 그들이 ‘목사님은 어디서 성경을 많이 배웠느냐?’며 그때부터 마음을 열고 여러 가지 대화를 했다.
담대함은 지식으로부터 온다.
이승효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