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예수를 만나면 형통하다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다(요5:38~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에는 우리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러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신약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를 데리러 오실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성경을 한 구절로 압축한다면 어떤 말씀이 될까요?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가장 쉬운 길을 주셨습니다(롬10:10).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원’이란 영혼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존하는 문제에서도 구원하신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의 2/3 동안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신 것이 그 증거요, 이사야서 53장 5절의 말씀이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더욱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고, 병들게 하고, 죄 가운데로 끌고 가고, 고통스럽게 하고, 싸우게 하는 주범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에 더욱 그러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바로 마귀라는 놈입니다. 마귀가 졸개인 귀신들을 동원하여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 쫓아내셨습니다(눅13:3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곧 당신에게 일어날 일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에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14:16~18).
‘보혜사’는 ‘보살피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곧 위로자, 중보자, 돕는 자, 상담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본시 보혜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우리의 보혜사가 되시어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그런데 곧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셔야 하므로 우리를 도울 또 다른 보혜사를 이 땅에 보내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고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요16:7). 왜냐?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은 우리 각자와 연합할 수 없으나 성령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보혜사로 각 심령에 임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야 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을 기다려야 했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가야 했고, 중풍병자를 둔 네 명의 친구는 지붕을 뚫어서 예수님께 다가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보혜사인 성령은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늘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축복입니까?
여러분, 성령은 예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예수 이름이 어마어마한 권능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2:9~10).
이토록 위대한 이름, 예수의 이름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1:12),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행1:8).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니 그의 권세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는 말씀이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전하던 베드로와 요한이 제사장들과 사두개인에게 잡혀 옥에 갇혔습니다(행4). 이 일로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는데, 이날 대제사장을 포함한 그들 문중이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4:18).
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유명한 표적’ 때문이었습니다(행4:16).
‘유명한 표적’이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게 한 사건입니다
(행3). 이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자 예수를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던 대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은 난감해졌고, 한편 시기가 발동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4:7). 그러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합니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8~10). 바로 ‘예수 이름’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을 ‘구원을 얻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도 현세의 문제해결이 구원임을 말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앉은뱅이에게 구원은 서서 걷고 뛰는 것이고, 가난한 자에게 구원은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영혼의 구원이 없었겠습니까?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도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자는 베드로와 사도들이 행했던 ‘유명한 표적’, 곧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음을 입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는 것이 다 예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이름을 소유하는 것은 인생의 마스터키를 소유한 것과 같습니다. 물질축복의 문, 건강의 문, 행복의 문, 형통의 문, 영생의 문을 마음대로 열 수 있는 마스터키가 성령을 받아 예수 이름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총알이 장전된 총일지라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토끼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습니다. 가난과 저주와 병과 죄를 주관하는 것은 악한 마귀요, 귀신일진대 그것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세요. 그러면 총알이 나가듯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그 앞에 그것들은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사용하여 명령하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예수 이름으로 축복하고, 예수 이름으로 안수해야 예수 이름이 나가서 여러분이 구한 것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요14:13).
가난합니까? 병들었습니까? 사업이 잘 안 됩니까?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세요. 분명히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이나 형식적인 유대 종교에 머물러있는 자들에게 하셨듯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5:47). 이는 통념적인 신앙을 버리고 나 예수를 믿으면 기적을 보리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할렐루야!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고 사용하라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