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포인트(turning point)
터닝포인트(turning point)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작곡가 헨델은 17세 때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정식으로 음악을 시작한 지 불과 4년 후인 21세에는 이미 건반 악기의 거장이 되었고, 40세가 되었을 때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재능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헨델은 엄청난 인생의 역경을 만나게 되는데 더욱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건강이었다. 헨델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결과 재활을 통해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지만 음악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에 대해 크게 실망한 헨델은 마지막 고별 연주회를 하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숨어지냈다.
하지만 고별 연주회를 한 지 4개월 만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찰스 제닝스라는 친구가 찾아와 헨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토대로 한 가극 대본 하나를 전해주었다. 이미 폐인이 되다시피 한 헨델에게 위로도 할 겸 그가 작곡을 하면 작은 연주회라도 하나 열어줄 생각으로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대본을 읽은 헨델은 대본을 통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영감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와 21일 동안 쉬지 않고 곡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이틀 동안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편곡을 했다. 드디어 24일 만에 260페이지의 대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이 작품을 ‘메시아’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 헨델의 ‘메시아’는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터닝포인트의 기회가 한 번 이상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온 것은 아브라함에게 터닝포인트였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것도 그에게는 터닝포인트였다.
우리 자신을 늘 속이는 거짓말이 있다.
‘인맥이 없다, 가방끈이 짧다, 태생이 그렇다,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다, 이미 다 해보았다’, 이런 거짓말에 속고 있으면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헨델처럼, 아브라함처럼,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도 이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삶의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늘 예고 없이 다가온다. 그 터닝포인트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라.
이정금 전도사
문제를 친구 삼아라
철모를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모처럼 찾아왔다. 그는 나를 보더니, “야, 춘석아, 너 몰라보게 달라졌다.” 하는 것이다. 아이고!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친구의 넉살에 조금 얼굴이 화끈거리기는 했지만, 나도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너도 몰라보겠다.” 맞장구로 우정을 확인했다. 친구란 이렇게 언제 만나도 반갑고 좋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문제를 친구 삼는 거야.”
우리는 문제가 다가오면 지레 겁부터 먹는다. 그러나 문제를 친구 삼는 거다. 막역한 친구를 대하듯.
이렇게 당당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린다. 내가 문제 앞에 끙끙거리니까 상대적으로 문제가 더 커 보이고, 감당키 어려운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세상에 답이 없는 문제는 없다. 다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관건이다.
처음 목회를 할 때,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많이 놀라고 떨었었다. 언젠가 새벽에 다급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바지를 뒤집어 입고 뛰어나간 적이 있다. 그렇다고 그만큼 일이 빨리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이제 경륜이 쌓였다고 해야 할까, 당황하지 않는다. 대신 문제에게, ‘문제야, 잘 왔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주지.’라고 인사를 한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 아닌가. 마음먹기에 따라 문제의 양상은 달라진다. 문제의 답이 하나라면 왜 굳이 겁내며 당황하며 다가가려 하는가? 당당하게 대하라. 문제를 친구 삼자. 그것도 코흘리개 적 그 친구처럼 말이다. 별거 아니다.
이초석 목사 저서 ‘적보다 무서운 것은
무능한 지휘관이다’ 중에서
수련회에 참석합시다
자녀들과 저녁 식사를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평소 식사 기도를 시키면 씩씩하게 하던 둘째 딸이 어쩐 일인지 머뭇거리면서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서 하라고 해도 아이가 삐죽거리면서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제가 식사 기도를 하고 나중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아이에게 물어보니 아이는, “기도하면 안 돼.”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안돼? 늘 기도하고 식사를 했잖아.” 그랬더니 선생님이 기도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봤더니 어린이집에서 자녀가 기도할 때마다 선생님이 옆에 오셔서 기도하면 안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집 교사가 대체 무슨 권한으로 아이가 식기도 하는 것을 금했나 하고 알아봤더니 ‘아동복지법’ 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아동복지법에는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이나 신앙 행위(기도)를 강요할 수 없다.’라는 항목이 있답니다. 어린 자녀가 기도하는 것은 집에서 부모가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화만 낼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린이집을 옮길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어린이집을 옮겨도 똑같은 법령이 적용되는 현 교육제도 안에서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습니다.
가치관의 혼란을 겪은 딸의 마음을 달래주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잘 일러주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어린 자녀들이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다음 세대이지만 그 이전에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님의 법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훈련받는 것이 앞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정 내에서 확실한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어야 이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귀한 시간이 있습니다. 다가오는 여름수련회입니다. 이 수련회는 그야말로 용광로 같은 충만함을 회복할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음 세대에 관심을 갖고 적극 동참, 그리고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이현승 목사
거절된 기도의 지연된 응답 2
거절된 기도에서 응답이 지연되는 대표적 사례 중 하나는 자녀를 위한 기도입니다. 오랜 기간 절실한 심정으로 새벽마다 간절히 자녀를 위해 기도해보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공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가 거절되고 지연되는 것으로 가슴 한편이 저미고 때로는 한숨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왜 자녀를 위한 기도가 거절되고 지연되는 것일까요? 기도가 거절되거나 지연되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구하지 않고 오로지 내 뜻대로 간구하며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처럼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내가 먼저 김칫국부터 마신 것입니다.
나도 오랜 기간 새벽마다 그리고 틈틈이 자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거절되었고 지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기도하던 중 최근 지연된 기도의 응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른 새벽 기도를 마치고 묵상하던 중 하나님이 딱한 표정으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녀들은 내가 주었지만 너를 통해 세상에 나왔고, 그러기에 네 자녀들은 바로 너 자신이다! 너는 네 자녀들을 위해 기도했지만 실상은 너를 위해 네 뜻대로, 네 고집대로 기도하였다. 그러기에 거절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나님은 제 아버지입니다.”, “네 자녀는 너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또 제게 물으십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질책하시듯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 여호와의 손길이 되어 네 자녀를 위해 왜 길을 열지 않으며, 네 최선은 다하지 않고 네 책임을 나 여호와에게 전가하며 그저 기도라는 명목으로 너는 왜 수수방관하고 있느냐?”
“아!” 나는 그때 깨닫습니다.
다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앞에서 끌고 가거라. 내가 네 뒤에서 밀어주리라.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는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하느니라! 네 자식을 위해 땀 흘리고, 수고하고, 핍박받고, 욕먹는 것이 자녀를 네게 보낸 나 여호와를 위해 하는 것이니라!”
최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입니다. 내 뜻대로 자녀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정의하고 꼭 이렇게 이루어주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구하지 않았으며 내가 간구한 것이 내 자식에게 최선의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출애굽하는 과정에서의 모든 기도는 어린 자녀를 돌보시듯이 하나님이 들어주시며 즉시즉시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나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성인이 된 자녀의 기도와 간구에는 하나님의 뜻이 배제된 경우 거절하시고 기도의 응답을 지연시키시며 오랜 시간 하나님 뜻을 우리 스스로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지 못하여 답답하시고 초조하게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계속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지연된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자녀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고 힘쓰며, 때론 핍박으로, 때론 비난으로 힘들겠지만 자녀를 섬기는 일도 주님의 일이고 은혜입니다.
최선의 노력으로, 최고의 마음가짐으로 자녀를 섬기며 주의 길을 가겠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내게 맡기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가는 영광과 승리의 길입니다.
신우신경외과 재활의학과
(메디스템 줄기세포센터)
대표원장 안계훈
동행하는 삶
어떤 남자 둘이 오토바이를 타고 속력을 내다가 그만 교통경찰에게 걸렸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목사님’이었다. “아실만 한 분들이, 천천히 다니십시오. 사고 납니다.” 그러자 뒤에 탔던 목사님이 자기도 모르게, “경찰관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까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경찰관은 정원 초과 벌점 10점과 함께 스티커를 끊었다. 과연 하나님은 그 오토바이에 함께 타고 계셨을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하는 모든 일 속에 함께 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얼마나 많은 동행의 삶을 살고 있을까?
성경에 ‘에녹’은 365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사람이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순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300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겨졌다. 성경에는 에녹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승천을 앞둔 에녹의 삶의 목적과 방법이 하나님이었고, 하나님 중심이었고, 언제나 하나님을 제일로 여기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볼 수 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결국,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평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인정받은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기쁘게 동행하려면 서로 일치하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조건에 맞는 동행을 했다는 것이다.
동행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방향’이 같아야 한다. 목적지가 서로 다르면 동행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이라는 목적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이 같아야 한다. 비록 목적지가 같다고 해도 수단과 방법이 다르면 동행할 수 없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한 사람은 비행기를, 다른 한 사람은 자동차를 이용하거나 한 사람은 빨리 가고, 한 사람은 느리게 가는 것 모두 동행이라 할 수 없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서로가 자신을 포기하고 서로에게 맞추며 한 가지 방법으로 함께 할 때 끝까지 동행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은 주님과 동행하며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따라서 움직이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멈추면 따라서 멈췄다. 우리의 인생도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심이 서실 때 서야 하고 주님이 가실 때 가야 평생 주님과 보조를 같이하며 동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동행이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 날마다 하나님과 호흡하는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동행의 관점에서 볼 때 에녹의 삶은 완전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이를 낳았고, 자녀를 양육했다. 동행하면서 아침에 집을 나섰고 동행하면서 집에 돌아왔다. 이처럼 날마다의 삶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 이것이 신앙의 삶이 아닐까 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한 주가 지난주 같은 날이 반복된다. 날마다 같은 일을 하고, 자질구레한 일로 쫓기다 보면 그저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이다. 솔로몬은 ‘전에 있던 일이 다시 생기고 전에 하던 일을 또 하는 것이며, 그래서 세상에 새로운 일이 없다’라고 했다. 수없이 반복되는 평범한 날이지만 우리 삶의 내일은 ‘염려’가 아닌 ‘기대’를 가지고 가장 좋고 가치 있는, 그리고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Dr.권정미
jmgood77@gmail.com
공중의 새
“아빠, 오늘은 무엇으로 끼니를  때울지, 이번 계절은 무슨 옷으로 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만약 어느 날 초등학생인 아들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걱정스러운 말을 한다면, 아버지로서 나는 무척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믿음이 적은 자들에게 탄식 섞인 말씀으로 나무라셨다.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지만 하나님께서 입히시는데, 하물며 자녀들을 돌보지 않으시겠냐고.
그런데 이 말씀은 세상의 염려 속이 아닌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거하라는 뜻이지, ‘알아서 해주시겠거니’ 생각하며 세상의 필요를 넋 놓고 기다리라는 뜻은 아니다. 공중의 새는 먹이를 찾기 위해 날아다니다 발견하면 예리한 눈으로 한참을 인내하며 낚아챌 기회를 기다린다. 기회가 포착되면 전력을 다해 날아가 먹이를 획득한다. 오직 새장의 새만이 가만히 앉아서 먹이를 기다린다. 들의 풀은 한낮 뜨거운 햇빛을 견디고, 때론 모진 비바람도 버텨낸다. 그러면서 꽃을 피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땅으로부터 양분을 끌어올린다. 오직 화분의 꽃만이 평화롭다.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이에 염려는 내일로 미루고, 먼저는 하나님 안에 거하기를 힘쓰고, 우리 할 일에 집중하며, 역경을 마주할 때마다 끝까지 온 힘으로 버티는 것이 인생의 정도이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걱정하는 당신에게도 말씀하신다. “아빠가 있는데 도대체 왜 그런 걱정을 하니? 너는 네 할 일이나 해라.”
(마6:34).
박찬영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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