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이 없는 것은 꿈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꿈입니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 모세에게 하나님이 주신 꿈입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주신 꿈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먼저 이렇게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왜냐? 꿈이 있어야 의욕이 샘솟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넣어야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못 배운 사람도, 돈이 없는 사람도, 몸이 아픈 사람도 아닙니다.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고(故)정주영 회장의 학력은 초등학교 중퇴입니다. 세계적인 기업가인 일본의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몸이 약했고, 지지리 가난했으며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악조건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른 것은 그들에게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고급 자동차면 뭐하겠습니까? 달려갈 곳이 없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이 아니겠습니까? 최신형 핸드폰이면 뭐합니까? 전화 걸 곳이 없고, 검색할 것이 없다면 그것 역시 쓸 데 없는 고철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꿈이 없는 자가 이와 똑같습니다.
여러분, 꿈은 곧 목표입니다.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을 인생의 비극이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 아니라 달성하고 싶은 목표, 곧 꿈이 없는 것이 인생의 최대 비극입니다. 그런 자는 매사에 의욕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삶의 의욕이 없습니까? 그것은 세상 탓이 아닙니다. 당신이 못 배운 탓도, 부모를 잘못 만난 탓도 아닙니다. 당신에게 꿈이 없기 때문입니다. 꿈이 생기면요, 삶이 달라집니다. 모세를 보세요. 도망자로 40년을 광야에서 보낸 모세는 날이 새면 그저 양들을 목초지에 풀어놓고 하늘이나 올려다보는 그런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이라는 목표가 생기자 없던 의욕이 샘솟았고, 의욕이 샘솟으니 지혜도 생기고, 통솔력도 지닌 위대한 지도자로 변모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사랑하던 스승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베드로, 그에게 꿈이란 아예 없었습니다. 당연히 삶의 의욕이란 없었습니다. 그저 그물이나 던져놓고 세월을 낚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목표가 생기자 사도라 칭함이 부끄럽지 않은 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꿈은 이렇듯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꿈이 생기면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난항에 부딪치면 더욱 의욕을 불태우지요. 야곱의 목적은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하여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외삼촌이 자신을 속여도 좌절하지 않았고,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해도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의 꿈은 스승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꼭 이루고야 말겠다, 기필코 그리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게 쉽게 이뤄졌습니까? 아닙니다. 엘리야가 길갈에서, 벧엘에서, 여리고에서, 요단에서 엘리사에게 계속
‘가라, 가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엘리야의 승천까지 지켜보며 그의 곁을 끝까지 사수했습니다. 그 결과 엘리야보다 갑절의 능력을 받고 엘리야의 빈자리를 승계했습니다(왕하2:1~14).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나 반드시 전쟁에 이겨 이스라엘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던 입다, 꼭 아들을 얻고야 말겠다고 기도한 한나, 이들 모두 꿈이 있었기에 포기,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목표는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다가 중도에 포기하기 때문에 그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지, 목표에 다가가면 다시 목표가 저 멀리 도망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치악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 사람들이 올라가다 중간에 포기하고, 3부 능선, 7부 능선에서 밥이나 먹고 놀다가 내려오니까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제가 말씀드리고, 또 찬송도 하는 것입니다.
‘꿈은 우리를 버린 적이 없다, 희망도 우리를 버린 적이 없다’고요. ‘우리가 꿈을, 희망을 버린 것’이라고요.
포기하는 자는 스스로 인생의 터널을 동굴로 만들어버려 그 안에 갇혀 살다 갑니다. 조금만 인내하고 나가면 탈출구가 있는데 포기하고 거기에 주저 앉아버리기 때문에 그 안에 갇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실패의 원인은 포기입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다가 천 번에서 그만뒀다면 실패로 남았을 겁니다. 거기가 인생의 동굴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기에 2천번 만에 성공했고, 터널을 빠져나와 광명의 세상을 살게 된 것입니다.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부끄러움 때문일 겁니다. 자존심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적의식만 분명하다면 그깟 자존심이 문제입니까? 성공하면 팔아먹은 자존심, 일순간 다 돌아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세요. 그 여인은 예수님만 만나면 딸이 나음을 입을 거라는 꿈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녀의 면전에 대고 “개 같은 여자여, 어딜 감히!”(막7:27)라며 자존심을 발로 뭉갰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개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내 딸만 고쳐주십시오.”(막7:28)라고 했더니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극찬하셨고, 소원을 이뤄주셨습니다(마15:28).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요? 그분은 인류구원, 곧 저와 당신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다 버리셨습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여러분, ‘과정은 결과를 대변할 수 없지만, 결과는 과정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늘, 반드시 인지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흐지부지한 것도, 신앙에 열정이 없는 것도, 조그만 시험이 와도 무너지는 것도 꿈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꿈, 그날에 받을 상과 면류관에 대한 꿈이 없거나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9~30)는 말씀이 꿈이 되었기에 어떤 핍박과 환난이 와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 꿈이 있었기에 타협하지 않았고, 고난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저뿐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고 말한 것처럼, 여러분도 주를 위하여 수고하고, 주를 위해 참으면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죽음 다음에 심판이 있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위해 산 우리를 위해 천국과 상과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 꿈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더욱 불쌍하겠지요
(고전15:19). 우리가 주일에 놀러가길 합니까? 되레 우리 스스로 절제하고 살지요. 목숨보다 귀하다는 돈을 내면서 주의 일을 하지요. 그러나 그것이 그 꿈을 향해 가는 기쁜 길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핍박하면 어떻습니까? 믿음의 선친들은 목숨도 내놓았는데, 까짓 주를 위해 욕 좀 먹고, 손해 좀 보면 어떻습니까? 꿈이 있는데요. 현재의 고난쯤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롬8:18).
부활절을 맞아 부디 여러분의 꿈이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목적의식이 살아나고, 내세의 소망이 다시 불일 듯 일어나기 바랍니다. 이것이 부활절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할렐루야!
오늘의 계란보다
내일의 암탉을 키워라
꿈은
인생의 나침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