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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림돌을 디딤돌로

1145호 · 2022-04-17
세상을 보는 창

걸림돌을 디딤돌로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한다.” 목사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다. 인생길에는 수많은 돌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돌을 걸림돌로 볼 것인가, 디딤돌로 볼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내일이 달라진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이다. 위기란 전환점으로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할 때이다. 코로나 위기로 많은 부정적인 것이 있었지만 긍정적인 것도 있다.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은혜이고 축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시간을 악용하여 믿음이 퇴보되었고,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시간을 선용하여 믿음이 성숙하게 되었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만약 요셉이 형들에 팔리지 않았다면 이집트에 갈 수 없었고,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가 없었더라면 감옥에 갈 수 없었을 것이고, 술 맡는 관원을 만날 수 없었다. 또한 술 맡은 관원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바로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총리뿐 아니라 아버지와 형제들을 도와줄 수 없었을 것이다. 요셉은 모든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켰다.

상처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면 상처는 축복이다.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이기에 상처도 치유도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받는다. 관계의 중심에는 말이 있다. 솔로몬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고 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세상이란 학교에 등록해서 다양한 과목을 배운다. 내가 잘하는 과목도 있지만 못하는 과목도 있다. 필수과목도 있지만 선택과목도 있듯이.

모든 수업에서 과제는 필수이다. 과제가 없기를 기대하지 말고, 과제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과제를 축제로 바라볼 수 있다면, 과제는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 될 것이다.

예배는 축제다. 예배는 구원 받은 자의 특권이지 의무가 아니다. 우리는 축제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예배가 의무가 되면 예식이 된다. 신앙생활이 의무가 되면 종교생활이 된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특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정금 전도사

jungkm@nate.com

오늘의 메시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간혹 성도들에게 “콩 심으면 뭐가 나지요?” 하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콩이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아니요, 그건 결과론이고, 콩 심으면 절대 콩 나지 않고 싹이 납니다. 그 후에 잎이요, 결실케 되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인내로써 결실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눅8:15).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원하면 인내를 통한 과정에 충실하라. 자기 일에 근실한 자는 왕 앞에 설 것이다(잠22:29).

성공을 원하는 자들이 그 성공에는 인고의 과정이 있음을 간과한다.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결과는 과정을 대변한다.”고 목사님은 늘 강조하신다. 즉 이 말은 인내의 과정 없이는 결과도 없다는 말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리라”(약1:4). 성경은 믿음의 선친들이 인내로써 끝까지 과정을 지켰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었다고 기록한다. 아브라함은 25년, 야곱은 20년, 요셉은 13년…. 마태 또한 인내로써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기록하고 있다(마24:13).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날 때 인내하지 못하고 불평과 조바심으로 일관했기에 약속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이 인내하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황량한 광야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하고 불평하며 조급할 뿐이었다(출14:11).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광야 40년을 끝까지 인내함으로써 마침내 가나안 입성을 이루게 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인내로써 견고히 잡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것이다(히3:14).

김상욱 목사

낮은 울타리

나의 주 무리는 어디인가?

얼마 전 인터넷에서 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한 마리 강아지가 달릴 때 네발로 뛰는 것이 아닌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는 영상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토끼 무리와 함께 자라다 보니 토끼에 영향을 받아 토끼처럼 뛰게 된 것입니다. 또, 그다음 영상에는 양이 나왔습니다. 강아지 무리에서 함께 자란 양은 강아지처럼 네발로 힘차게 뛰어다니는 모습이었습니다. 개와 양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속해있는 무리가 다르다보니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그들처럼 변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어쩔 수 없이 동물과 사람 모두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나의 ‘주 무리’에 영향을 받고 그 무리를 닮아가게 됩니다.

제가 대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학교생활이 너무 즐거워서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학교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동아리에 들어가 주중 저녁 시간을 학교에 쏟았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세상 무리에 속해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세상 사람들처럼 말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전까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는데, 저의 주 무리가 바뀌니 이제 예수님이 아닌 그들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후 꼭 주중 기도모임과 예배를 사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친구들이 그런 저를 미련하게 볼 때도 있었지만, 예수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결단한 것입니다.

주로 어디서 누구와 시간을 보내십니까? 나의 주(主) 무리는 어디입니까? 개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토끼 무리에 둘러싸여 있으면 결국 개의 본성을 잃고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어다니게 됩니다.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믿음과 신앙이 아무리 굳건하여도 내가 세상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줄인다면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있는 크리스천의 본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약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주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많은 모임과 예배를 허락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다가도 그 예배로 저희는 크리스천의 본성을 다시 회복하고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매일 기도와 예배로 주님과 함께 하여 하나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냅시다. 나의 주 무리를 예수로 삼아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는 예수중심교인이 됩시다!

장수정

청춘, 그 아름다운 이름

매일이 부활절

올해 저는 공부를 하나 시작했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놀고 싶고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노트북을 켜고 강의를 듣습니다. 매주 내주는 과제를 꾸역꾸역하고 있어요. 처음 공부하는 분야라서 모든 게 버겁지만 일단 1년만 해보자고 생각하며 해나가고 있습니다.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학생이 아니고 회사 업무도 해야 하는 직장인이다 보니 시간관리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가계부를 쓰면 내가 어디에 지출을 가장 많이 하는지, 충동적으로 구매한 건 무엇인지, 이번 달엔 얼마를 쓰고 모았는지, 다음 달엔 얼마를 모을 수 있을지 점검하고 계획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돈처럼 시간도 체크해볼 수 있습니다. 시간가계부를 써보는 거지요. 하루를 30분으로 쪼개 무슨 일을 했는지 기록하는 건데요. 예를 들면, 오전 7시부터 7시 30분까지 샤워, 7시 30분부터 8시까지 외출 준비, 8시부터 9시까지 이동, 9시부터 10시 30분까지 업무, 10시 30분부터 11시까지 직장 동료와의 커피 타임 등등, 30분 단위로 일상을 기록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 내가 어디에 시간을 많이 썼는지, 어디에 시간을 낭비했는지 한눈에 보입니다. 카드 내역서처럼요.

시간가계부라는 걸 알고 나서 저도 한 달 정도 기록해보았는데요, 잘 쓴 시간과 아까운 시간이 확연히 보이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하고 성경 읽고 스트레칭하면서 쓰는 1시간은 저의 하루를 여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반면 저녁을 먹고 나면 만사가 귀찮아져서 유튜브를 짧게는 1시간, 길게는 2~3시간씩 보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멍 때리기만 2시간 할 때도 많고요. 아까운 시간이지요.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어째 읽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없지 않더라고요. 유튜브 보는 시간을 책 읽는 시간으로 바꾸는 게 이번 달 저의 목표입니다. 물론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제도 못 지켰고요.

요즘은 작심삼일도 아닌 작심하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공부가 즐거워서 계획대로 실행하고, 하루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빈둥빈둥 보냅니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이었어요. 원래 세운 계획은 강의를 복습하고, 필기를 정리하고, 독서도 하려고 했는데 누워서 친구와 카톡만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잠든 다음 날에는 늘 마음이 개운하지 않아요. 어제를 아깝게 버린 것 같아서 찜찜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감사한 게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가 아니고 새날이라는 겁니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날이죠. 다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하나씩 목표를 이루고요.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날입니다. 하루 한보 전진했다가 다음날 반보 퇴보하더라도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망쳤더라도 오늘은 제대로 해볼 수 있지요. 뭐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날, 다시 살아난 날, 부활절은 1년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밤과 아침을 주셔서 다시 힘찬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셨지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어제 기도하려고 했는데 기도하지 못했나요? 오늘 하면 됩니다. 어제 성경을 읽으려고 했는데 읽지 못했나요? 오늘 읽으면 되지요. 어제 용서하지 못했나요? 오늘 용서하면 됩니다. 어제 말의 실수가 있었나요? 오늘은 실수하지 않으면 됩니다. 오늘은 새날입니다. 우리에겐 매일이 부활절입니다.

신은혜

dopal0203@naver.com

치우치지 않는 저울

천국에서 걸려온 전화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옆집 권사님을 통해 어머니와 저는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복음이라고는 들어본 적 없는 집안에서 제사를 거부하는 어머니는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핍박을 받는 중에도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오랜 기도와 전도 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외할머니께서 예수님을 영접하자, 어머니께서 가장 먼저 모든 제사 도구와 위패를 불태워버렸습니다. 그 후, 장성 기도원에서 집회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께서 외할머니를 모시고 참석하기도 했지만, 시골에서 외할머니 홀로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시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날은 아들, 친척의 핍박을 견디다 못해 외할머니께서 다시 제사 도구를 마련하려다가 넘어져 고생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외할머니를 불신앙의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믿음이 바로 설 때까지만이라도 모시려고 했지만, 농사일을 그만둘 수 없다며 외할머니는 끝내 시골에 머물렀습니다.

외할머니께서 힘이 쇠약하여 농사일을 할 수 없는 연세가 되셨습니다. 그 시기에 모든 자녀가 각자의 사정으로 외할머니를 모시기 힘든 처지였습니다. 저희 가정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때였지만, 어머니께서 외할머니를 모셔왔습니다. 6남매 중 막내였던 어머니께서 외할머니를 모셨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외할머니의 영혼 구원 때문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 예수님과 친밀하게 지내셨습니다.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나면, 찬송가 하나쯤은 부를 수 있어야겠다고 하시면서 벽에 큰 글씨로 찬송가 가사를 붙여놓고 부르곤 하셨습니다. 침대 옆에는 총회장 목사님의 설교가 항상 흘러나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외출하셔서 혼자 계실 때는 총회장 목사님의 기도 녹음을 틀어놓고, 일생 중 가장 많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때 외할머니께서 자녀를 축복하면서 기도하셨던 것들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늘 예수님과 동행하다가 주무시는 가운데 편안하게 소천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수고와 섬김, 외할머니의 생전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불모지였던 가문에서 처음 장례예배를 드렸습니다.

얼마 후, 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어머니와 함께 시골 외할머니 댁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 외할머니는 없었습니다. “엄마, 외할머니 어디 가셨어요?” 저의 질문에 어머니는 밝은 미소로 답하셨습니다. “외할머니는 좋은 곳에 계시지.” 곧 외할머니로부터 영상통화가 걸려왔습니다. 잔치가 열린 듯 즐거운 분위기 속에 외할머니는 지금껏 본 적 없는 기쁨이 가득한 모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너희들 덕분에 내가 여기에 있구나. 고맙고 사랑한다. 보고 싶다. 곧 만나자.”

어린 시절, 일가친척이 모이는 명절이 너무 싫었습니다. 명절은 그들 앞에서 어머니가 핍박받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문에 정말 복음이 들어올 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나왔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딸, 손자, 손녀 3대가 함께 예배드리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그저 부러울 뿐, 남의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친척이 점차 늘어나는 것을 보니 어머니께서 포기하지 않고 눈물로 뿌렸던 복음의 씨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가문을 세우는 일에 동참하면서 함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도하고 있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테니까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정명관

v-777@naver.com

울림 있는 삶

말투, 예쁜 말씨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했던 나는 책 속에서의 언어처럼 바른말, 고운말을 쓰고 싶었으나 현실세계에서는 너무나 동떨어진 비속어가 섞인 사투리 일색이었다. 지성인들이 많다는 서울에 상경했지만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칠고 험한 말로 상대를 다그치거나 무시하는 건 다반사이고, 잘난 척 훈수와 걱정을 가장한 설교, 끼어들어 구구절절 본인 얘기만 늘어놓는 사람들…, 선을 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로 인해 나만의 정신세계에 빠져 공허함을 느끼다가 딸이 태어나자마자 존대어를 써주며 품위와 교양, 예절, 대화법 등을 교육시켰다. 지금은 천진함과 조숙함으로 엄마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눈을 마주치며 함박웃음을 머금고 예쁘고 고운말로 행복감을 표현한다. 나 또한 자애롭고 부드러운 말씨로 맞장구를 치거나 진심어린 공감을 표한다.

어제는 한가한 오후, 딸은 엄마를 붙들고 조곤조곤 리액션까지 하며 교회 얘기를 멈출 줄 모르고 했다. 두 테이블에 7명의 손님이 식사 중이었는데 환한 미소로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화 과정을 공유하면 서로 간의 신뢰가 쌓인다. 고개만 끄덕여도 상대는 통했다고 믿는다.

겉으로는 경청하는 듯 보여도 대부분 자신이 뒤이어 말할 내용에 골몰하며 발언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금까지의 맥락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실수를 범한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하지만 긍정적인 자세로 나에게 예쁜 말을 걸며 학습과 연습을 통해 호감 가는 말씨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목사님은 ‘남이 말하는데 앞지르지 않기, 남의 말을 자르지 않기, 남이 말하는데 끼어들지 않기’를 대화의 3대 원칙이라 말씀하셨다. 말을 하는데 예절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 인격의 척도가 된다.

“엄마, 수고하셨어요.”, “아니야 우리 희선이가 제일 많이 수고했어.” 모녀의 예쁜 말씨에 행복하다.

추성숙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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