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너희는 복 받기를 싫어하느냐?(시1:1~6)
“복이 싫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이러면 손드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하고, 복이 내게 오기를 원합니다. 저도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복 이야기를 하면 기복신앙이라며, 그런 말하는 목사를 주의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단호히 말합니다. 기복신앙이 위험하다느니, 신비주의가 잘못됐느니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기복신앙이 뭡니까? 목적이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 성취를 목적으로 삼는 현세적인 신앙 행태를 말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예수님이 열 명의 문둥병을 고쳐주셨는데, 아홉은 고침을 받자 바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것이 기복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복을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춘 자들 말입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한 명은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복을 얻고자 함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요, 받은 복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왜 복 달라고 하는 것이, 복을 원하는 것이 기복신앙입니까? 가난하게 살면서 예수 믿으라고 해보세요. ‘너나 잘 살아라’ 그럽니다. 병들어 골골 대면서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해보세요. ‘웃기고 있네, 너나 가라’ 그럽니다. 그래서 내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건강해야 합니다. 내가 잘돼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고, 내게 있는 것으로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이타주의의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복음(福音)은 복 받으라는 소리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란 부자가 되는 길이 있다는 소식이고, 병든 자에게 복음은 병을 고침 받는 길이 있다는 소식이고, 문제에 봉착하여 고통 중에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지옥에 빠질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복음은 예수로 인하여 죄의 사슬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잘 살면 다냐?’ 그러는 사람들, 그럼 못 살아야 정상입니까? ‘교회가 크면 다냐?’ 그러는데, 그럼 교회가 작아야 정상입니까? 뭔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모든 인생의 질고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육체로 오셔서 모든 고통과 죽음을 체휼하셨습니다. 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현존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사실 이 설교는 지난 수요예배 설교입니다. 그런데 사업에 성공한 장로들이 저에게 이 설교를 다시 보여 달라고 강청하며 “목사님, 우리 성도들도 저처럼 복을 받아야 합니다. 복 받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잘 되고 성공하니까 예수 믿으라고 하면 ‘당신처럼만 될 수 있다면 믿지요’ 합니다. 믿는 자들이 잘돼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럼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목적도,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고 성공해야 하는 목적도 다 주를 위한 것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에 사는 지인이 30만 평 대지에 산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뻥인 줄 알았습니다. 뻥도 너무 세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가서 보니까 모든 게 사실이었습니다. 올림픽공원만 한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집까지 들어가는데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갔고, 그 안에 사냥터도, 낚시터도 다 있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미국의 하나님은 누구고 한국의 하나님은 누구냐?’ 저는 생각이 깊었습니다.
또 한 번은 집회 차 미국에 갔을 때 갈보리 교회의 척 스미스 목사를 만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그분이 한국에 오셨을 때 제가 대접을 했기에 안면이 있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분은 교회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교회 측에서는 목사님이 기도하러 가셨다고 했습니다. 제 관념대로 기도원이나 아니면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들 말이 바다로 기도하러 가셨다는 겁니다. ‘뭐? 기도를 하러 바다로 갔다고?’ 생소해서 물었지요, “바다에서 기도하다니요?” 그랬더니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기도한다는 겁니다. 쇼킹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하나님과 한국의 하나님이 달라서가 아닙니다. 우리 생각의 차이가 이런 엄청난 결과를 낳은 겁니다. 믿는 자가 잘 살면 죄처럼 여기는 우리의 의식이 변해야 미국을 축복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히 복도 하나님께로 납니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히6:14). 복이 하나님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2). 이 말씀은 복을 준다는 개념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체가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자체가 복이다’, ‘네가 복덩어리다’ 그러신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만 그러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너는 복덩어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128:1). 시편 1편에도 ‘복 받은 사람’이 아니라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복덩어리로 축복하셨습니다. 신명기 28장을 보십시오. 나가도 복, 들어가도 복, 손대는 것마다 복, 심지어 내가 기르는 짐승까지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왜냐? 우리 자체가 복이라 그런 겁니다. 요셉이 들어가는 곳마다 복을 받았지요? 요셉 자체가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마땅히 복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못한 것은 전제조건이 성립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의 약속에는 전제조건이 따른다는 것을요. 아브라함에게 그냥 복의 근원이 된다 한 것이 아니라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는 전제조건을 붙이셨습니다. 여기에 순종할 때 복이 임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신28:1), 전제조건입니다. 시편 1편에도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등등 전제조건을 붙이셨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 편에 설 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복덩어리로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이지 부족함이 없습니다. 미천하고 부족한 제가 하나님의 종이 된 것도 그렇고, 세계를 복음화한 것도 그렇고, 또한 세계 어디를 가도 돕는 자가 늘 준비되어 있습니다. 제 자식도, 형제도 그렇게 못합니다. 그들이 저를 예수님 섬기듯 하는 것을 보면 저 자신도 놀랄 지경입니다. 왜 제가 그런 복을 받았는가 생각해보면 제가 늘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 제 목숨까지 내놓았는데 제가 하나님 말씀에 ‘아니요’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더러 내 편이 되어달라고 하지 말고, 여러분이 하나님 편에 서면 됩니다. 그 안에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떠나면요? 사울을 보세요. 하나님 편에 섰을 때와 그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어떻게 달라졌는지를요. 롯이 아브라함 곁에 있을 때는 번성했지만 떠나더니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지 않습니까? 복 있는 사람 곁을 떠나도 그리하건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면 어찌 되겠습니까? 여호사밧은 하나님 편에 설 때는 승승장구하였으나 하나님을 떠나니 결국 본인은 물론 비참한 가족사를 남기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어느 부모가 자식이 못 살고 병든 것을 원하겠습니까? 내가 고생해도 너만은 고생하지 말라는 것이 부모 마음일진대 당신의 아들을 죽여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가 가난해서 꾸러 다니고 병들어 골골대는 것을 원하시겠습니까(마7:9~11)?
하나님 안에 복이 있습니다. 복 받으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법을 준행하면, 곧 하나님 편에 서면 복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 편으로 들어오세요. 복이 분명히 따라옵니다. 그 복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시다. 할렐루야!
부모는 자식이
잘 살기 원한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