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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2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믿음은 들음으로부터

1142호 · 2022-03-27
겨자씨만한 믿음

믿음은 들음으로부터

어떤 실험에서 특정 그룹에는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 단어를 보여주고 해당하는 단어로 문장을 만들게 하였고, 다른 참가자 그룹에는 노인과 무관한 단어로 문장을 만들게 하였다. 과제를 마친 후 실험이 끝났다고 참가자에게 알리고 참가자들이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속도를 측정하였다. 노인과 관련된 부정적인 단어로 문장을 만든 사람들이 걸어가는 속도가 평균보다 느렸다고 한다. 잠깐 문장을 만들었을 뿐인데도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90년대 희대의 탈옥수로 유명했던 신창원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엄한 성격이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범죄자가 된 계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으로부터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 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라는 막말을 듣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악마가 태어났음을 느끼고 어둠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부모님으로부터 긍정적인 말을 듣고 자란 아이가 바르게 잘 자라서 큰 사람이 되는 경우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성경 속에서도 ‘들음’의 중요성을 찾아볼 수 있다. 뱀의 간교한 말을 들고 선악과를 먹은 하와, 마귀가 주입한 예수님을 팔라는 생각에 붙들려버린 가룟 유다, 반면에 하나님 말씀을 잘 들었던 인물들은 모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어려움이 와도 담대한 믿음으로 극복한 경우가 수없이 많다.

부정적인 환경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긍정적인 환경은 긍정적이며 진취적인 결과는 낳는다. 장작 쪼개는 옆에 있으면 나뭇조각이 튀기고, 떡 찧는 옆에 있으면 떡 조각이 날아드는 법, 나는 어떤 환경에 속해 있는지 살펴보자. 부정적인 사람, 악한 사람들 속에 있다면 지금 당장 빠져나와야 한다.

김성일 집사

깊은 곳에서의 울림

금식의 위대한 약속

“엄마, 금식 좀 줄이시면 안 될까요? 건강이 염려돼요.” 밥 먹듯이 금식기도 하시는 어머니를 걱정하던 제게 어머니는 간증 하나를 해주셨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목사님께서 금식을 명하셔서 3일을 한 적이 있었단다. 그때 두 팔을 위로 들 수 없는 상태였는데 금식 후에 씻은 듯이 나아서 지금까지도 멀쩡해.” 금식기도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선명합니다(사58:6).

극심한 몸살에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어 고통스러워하던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성령님께서 금식하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 순간 ‘아픈데 밥을 굶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순종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금식을 시작한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아 제 몸에 있던 온갖 통증들이 사라졌고, 그 이후부터 저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금식기도 하셨던 어머니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본받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줄이 잡히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유튜브로 총회장 목사님의 설교를 듣던 중,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심신이 괴로웠던 다윗이 금식하였더니 기도가 그의 품으로 돌아왔다(시35:13)는 목사님의 말씀에 격동되었습니다. 금식기도 하며 조용히 자신을 살펴보니 혼탁했던 정신이 맑아지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죄가 떠올랐습니다. 애통하며 주님 앞에 회개하는 그 순간, 막혔던 기도가 뚫어지고 악의 영들이 떠남을 체험하였습니다. 할렐루야!

내 안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금식기도를 해야겠다는 갈망이 점점 생겨났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께 위로받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사람에게 보이는 금식이 되지 않기 위해 나의 언행을 조심하였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금식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평안 가운데 보이지 않던 길을 보게 하셨고, 돕는 사람을 붙여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지금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해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금식이라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열쇠가 있습니다. 세상의 부모도 자식이 밥을 먹지 않으면 갖은 노력을 다하여 그를 살리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하고 부르짖으면 상상해보지 못한 사람과 만물을 통해 도와주십니다. 우리 모두 문제가 있을 때 금식기도 하여 기적을 맛보고 주님께 영광과 간증을 올려드립시다!

김진실 사모

소망의 언덕

야성을 잃지 마라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집에 들어가는 길에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하려고 까페 문을 밀며 점원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마감했습니다.”

점원의 말에 시계를 보니 9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 넵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코로나로 인한 정부시책으로 영업시간이 변경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커피가 정말 마시고 싶었지만 저는 점원의 말 한 마디에 깔끔하게 대답하고 돌아섰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매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차에 올라타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나의 기도 생활이 이와 같다면 과연 나는 기도에 응답받을 수 있을까? 제발 한 잔만 팔아달라고 해야 했지 않았을까?’ 밤이니 돌아가라는 친구 말에 그것이 매너라고 생각하고 그냥 돌아섰다면 보리떡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인파에 막혔으니 그냥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면 네 명의 친구는 과연 중풍병자인 친구를 고침 받게 할 수 있었을까?’

요즘 몸에 조금만 이상이 오면 자가진단키트부터 찾습니다. 그것이 매너라고 생각합니다. 얼른 확진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내 옆 사람에게 이롭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신앙의 야성을 잃은 것은 아닌지…. 이런 것들보다 더 귀한 신앙의 야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저 스스로를 돌아보니 목사로서 코로나에 확진되면 여러 가지로 덕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많은 제약을 스스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맹수가 사냥꾼에게 잡혀 동물원에서 길들여질 때 단번에 야성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사육사가 던져주는 먹이와 길들이는 교육에 따라 서서히 야성을 잃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소유해야 할 자입니다. 총회장 목사님은 이런 와중에도 여전히 신앙의 최전선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자.”고 외치고 계십니다.

총성과 포화 속에서도 주님만 바라보며 찬양하고 의지하며 부르짖는 우크라이나 형제자매의 모습과 소식에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코로나로 위축되었던 모습을 끊어내고 다시 야성을 되찾기를 결단해봅니다.

이현승 목사

동행하는 삶

물에 얼굴이 비침 같이

어느 날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거실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아이에게 눈을 부릅뜨며 버럭 화를 낸 적이 있었다. 핑계를 대자면, 정리하자는 이야기를 하루 종일 했지만 엄마 말 안 듣고 정리를 안 했다는 건데, 사실 내 잘못이었다. 말로만 하지 말고 같이 정리했으면 됐을 텐데…, 그랬으면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날 저녁 아빠랑 같이 놀던 아이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화가 난 모습을 취해 나와 남편 둘 다 몹시 놀랐고, 아이는 아빠에게 많이 혼났다. 그 모습을 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찔렸다. ‘아까 내가 아이를 혼냈을 때 내 모습이 저랬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아빠와 이야기를 마치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사과를 했다. 엄마가 아까 미안했다고, 앞으로는 엄마도 조심하겠다고.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27:19)는 잠언 말씀이 떠올랐다. 엄마가 웃으면 아이도 웃고, 엄마가 화내면 아이도 같은 모습으로 화를 낸다. 말투도 마찬가지이다. 5살 된 둘째 아이의 말투가 나랑 똑같은 것을 보면서 다시금 깨닫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얼굴 표정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이해한다. 잠언 말씀이 요즘 함께하는 시간이 많은 나와 아이들의 관계에서도 적용되는 말씀인 것 같다. 그래서 마음을 먹고 스스로 미션을 만들어 아이에게 사랑을 표현해야겠다 싶었다. 예를 들어 하루에 3번 아이 보고 웃어주기, 따뜻하게 안아주기, 사랑한다 말해주기 등으로. 그렇게 했더니 아이도 달라지는 것이 보였다.

엄마, 아빠가 화를 낼 때의 표정, 또는 무표정한 모습이 우리 아이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부모 본인 눈에는 보이지 않아 그 강도가 얼마나 센지 미처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엄청나게 무서운 모습으로 보인다. 웃는 모습, 편안한 모습, 사랑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이고 전부이고 삶 그 자체이다. 부모를 통해 삶을 배운다. 부모의 삶을 닮아간다. 사람을 대하는 법, 인생을 살아가는 법,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는 법 등을 말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정말 중요한 건 사랑에 기초한 진심 어린 따스한 소통인 것 같다. ‘대화의 단절은 오해를 낳고, 오해가 길어지면 원수가 된다’는 목사님의 말씀을 다시금 생각해보며 오늘도 힘차게 엄마 공부 시작해본다.

정효경 집사

happy_hoiiy@naver.com

한라에 핀 샤론의 꽃

삶을 바라보는 시각 ‘기도’

사람은 누구나 기도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삶 가운데 불안과 자기의 유한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이런 모습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 에덴의 동쪽 ‘놋’에 살면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놋은 땅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유리하다, 방황하다’라는 뜻도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인간의 기본적 상태는 불안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고, 마음에 헛헛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불안과 공허함을 내면에 간직하고 산다는 것에. 불안하다는 것은 마음에 안식이 없다는 얘기이다. 안식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결핍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의해 결핍이 채워지길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따라서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느끼고 있는 결핍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외국에서 목회하는 친구의 얘기를 듣고 ‘기도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약 15년 동안 신앙 생활하셨던 분이 자신의 문제를 놓고 21일간 작정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도했던 일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단다. 그분으로서는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원하는 대로 기도 응답하지 않은 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더 이상 교회 다니지 않겠다며 교회를 떠나셨단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 새벽기도를 시작한다. 병에 걸렸을 때 철야기도를, 사업이 어려워졌을 때 작정기도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기도를 문제해결을 위한 방편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호출하기만 하면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짠'하고 나타나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존재로만 여기고 있는 듯하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서 발행한 기독교계 월간잡지 ‘성서조선(1927~1942)’을 쓰셨던 김교신 선생은 섣달그믐날 자기의 살아온 1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지난 1년 동안 나를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내가 당신께 드린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더욱더 감사하옵기는 제 기도를 기각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절박한 가운데 드렸던 기도를 거절해준 것이 더 고맙다고 고백하는 모습이 앞서 나눈 사례와는 참 대조되는 모습이다. 어쩜 김교신 선생은 때때로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기각해주신 것으로 인하여 겸허함을 배웠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기각된 기도가 오히려 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너희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마6:8)고 하셨지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하시는 하나님. 이는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하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또한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여러 문제로 힘들고 지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여쭙고 그 마음을 기준 삼아 나의 마음을 조율해나가는 것, 그것이 기도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과 조율되면 문득 지난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 기억하게 되고, 오늘 내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이 나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현실이 나를 억압하고 있던 그 힘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뿐인가 ‘때에 따라 내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채워 주신다.’는 확신이 생길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힘이다.

내가 한 기도가 기각되었다고 속상해하기보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소망하고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삶에 머물러 있는지를 생각해보면서 하나님 안에 머물려고 노력하며 기도하는 한주가 되기를 소망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Dr. 권정미

jmgood77@gmail.com

신앙에세이

그럴 수 있어요

고등학생 때였다. 당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들이 든 가방을 도둑맞은 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원망 섞인 기도를 했었다. 아차 싶어 원망한 것을 바로 회개하였고, 그렇게 기도하던 중 잃어버렸던 방언을 다시 찾게 되면서 그 사건까지도 합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살다 보면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을 마주할 때가 있다. 매일 기도했는데, 교회도 열심히 다녔는데, 하나님 말씀 따라 살려고 노력했는데, 이런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냐며 원망 섞인 기도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착각이 숨어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않는다 하신다. 반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다 하신다. 이 말씀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던 행하지 않던, 똑같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결혼에 골인하면 행복한 나날만 있을 거라는 착각처럼, 교회를 잘 다니면, 신앙생활만 잘하면, 앞으로의 삶은 평탄할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원망을 한다. 결혼, 사업, 학업, 인생의 여러 단계에서 우리는 풍파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만 잘 붙들고 있다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먼저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다음은 행해야 한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박찬영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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