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의 말에 동의하지 말라(민13:25~14:30)
암에 걸린 집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심방 가서 그 집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저 벽에 뭐가 보입니까?” 그랬더니 그 집사는 “시계가 보이는데요.”라고 했습니다. “집사님, 저 넓고 하얀 벽은 안보입니까? 시계는 저 넓은 벽에 극히 일부분 아닙니까? 암은 집사님 몸에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집사님 몸의 대부분은 아주 정상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의사가 무슨 말을 해도, 주위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거기에 동의하지 마세요. 동의하는 순간 집사님은 무너집니다. 매일 ‘나는 낫는다. 나는 완치된다. 하나님이 나를 치료하신다.’ 계속 긍정적인 말을 뿌리세요. 그러면 암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정에 동의하면 부정이 임하고, 긍정에 동의하면 긍정이 내게 임합니다. 검정 물감을 뿌리면 내 옷에 검은색이 묻고, 빨간색을 뿌리면 빨간색이 묻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12명의 정탐꾼을 파견합니다. 그런데 40일간 정탐을 마친 그들의 평은 너무 달랐습니다. 똑같은 곳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보고 왔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은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가나안 땅이 좋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아서 거기 가면 다 잡혀 죽을 거라고요. 그러자 백성들은 곡을 하며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부정에 백성들이 동의한 겁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
그 결과가 어찌 되었을까요? 먼저 부정을 퍼트린 자들부터 볼까요?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민14:36~37). 그리고 그 부정적인 말에 동조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과도 이렇습니다.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찌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민14:32~34).
하와가 마귀의 부정적인 말에 동의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어도 안 죽어. 하나님이 괜히 그러시는 거야.”라는 마귀의 말에 하와가 동의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는 바람에 인류가 죄인이 된 것 아닙니까.
오래전, 우리 성도 한 분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남편이 자꾸 때린다는 겁니다. 그 성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인 제공자는 바로 자신이었더라고요. 그 성도가 조장인데, 자기 구역의 성도가 남편에게 자주 맞았나 봅니다. 그래서 위로한답시고 ‘남자들 다 그래. 우리 남편도 어떨 땐 그러는데 뭐.’라고 했답니다. 그 후로 안 그러던 남편이 손찌검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 이 말씀 때문입니다. 우리가 앉고 서는 것, 우리가 숨 쉬는 것조차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야! 참 복 받기 쉽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귀에
‘나는 복 있는 사람이다. 나는 잘 된다. 나는 복이 많아. 나는 하는 일마다 잘 돼.’ 이렇게 들리게 하면 하나님이 그대로 해주신다는 말씀 아닙니까? 이것보다 쉬운 게 어디 있습니까? 말만 잘하면 되는데 이것도 못합니까? 그래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고 성경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차를 운전해주는 김충직 집사가 있습니다. 그와 지난주 김제의 전영수 장로가 오픈한 까페를 다녀오면서 그에게 이런 말을 해줬습니다. “충직아, 절대 부정에 동의하지 마라. 네 가족이나 동료직원이나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부정적인 말을 하걸랑 거기에 동의하지 마라. 동의하면 부정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부정이 네 삶을 덮게 될 거다.”
다들 김제에, 그것도 외지고 한적한 호수 앞 허허벌판에 까페를 오픈한다고 했을 때 염려를 가장한 부정적인 시선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곳에 왜 큰돈을 들여? 거기까지 사람들이 찾아오겠어?”라며 부정적인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전영수 장로는 그들의 말에 귀를 막고 기도하며 일을 추진하였더니, 군에서 그곳까지 도로를 닦아줬고 그곳이 벌써 명소가 되었습디다.
왜 부정에 동의하는 줄 압니까? 그것은 이미 내 마음에 부정의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이너마이트로 바위를 어떻게 깨는 줄 압니까? 다이너마이트에 연결된 선에 불을 붙이면 불이 그 선을 타고 들어가 다이너마이트가 터져서 바위를 깨는 겁니다. 내 안에 부정의 요소가 있으니까 그것을 타고 상대의 부정이 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을 잘합시다. 말이 씨와 같기 때문입니다. 씨 속에 생명이 있듯 말 속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좋은 씨를 심어야 좋은 열매를 거두듯 좋은 말을 삶 속에 심어야 삶이 윤택하게 되는 겁니다. 70이 넘게 살았어도 배추 심었는데 무를 거두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약3:12).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또 말은 누에가 뿜어내는 실과 같습니다. 어릴 때 누에고치를 본 적이 있습니다. 누에가 자기 입에서 뿜어내는 실로 자기 몸을 칭칭 감아서 그 안에 갇힌 것을요.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나를, 내 삶을 옴짝달싹 못 하게 동여맨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말은 ‘배의 키’와도 같습니다. 이는 야고보 선지자의 말입니다(약3:4~5). 요즘은 기술의 발달로 인해 웬만한 빌딩 크기보다 더 큰 배를 만듭니다. 그러나 수백 톤 혹은 수천 톤의 거대한 배라도 작은 키 하나로 움직입니다. 키를 왼쪽으로 돌리면 왼쪽으로 가고, 키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오른쪽으로 가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배도 우리가 하는 말에 의해 희망의 나라로도 갈 수 있고, 절망의 나락으로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강도들도 달렸는데, 한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했으나, 한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라고 말해, 하나는 절망의 나락으로, 하나는 희망의 나라로 가지 않았습니까? 말은 이생만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내세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러니 말의 위력이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세 치 밖에 안 되는 혀에서 생사화복이 납니다. 겨울철에 산불이 자주 일어나는데, 그 원인이 대부분 담뱃불 아닙니까? 툭 던진 작은 불 하나가 그 일대 산을 다 태우듯 세 치 혀를 통해 나오는 말이 우리 인생을 다 태워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혀를 잘 다스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3:8)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것일 뿐,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내 입을 절제할 수 있습니다. 왜냐? 말은 마음이란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음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로 가득하면 혀는 제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을 합시다. 긍정적인 말, 아름다운 말, 희망적인 말, 선한 말을 하고, 그 말에 동의합시다. 나쁜 말, 악한 말, 부정적인 말은 하지도 말고, 동의하지도 맙시다. 그러면 복 있는 자가 되고 온전한 자가 됩니다(약3:2).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벧전3:10~11). 할렐루야!
생사화복이
네 혀에 달려있다
인생은
말로 채색되는 예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