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깨달은 자의 고백이다(눅17:11~19)
작년 기도원에서 재배한 사과는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양적인 면은 물론이고 맛이나 크기도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원 식구들을 모아놓고 “아니, 아랫마을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는데, 우리 기도원은 왜 이러냐?”고 했더니, 오장로가 “저희 책임입니다. 관심이 없었던 거죠.”라고 했습니다. 저는 기도원 식구들에게 아랫마을에 사과농사 짓는 분을 직접 만나 배워보라고 말했습니다. 깨달은 기도원 식구들은 사과나무를 전적으로 담당할 사람을 정하고는 제 말대로 아랫마을 분께 방법을 물어 그대로 실행하며 열심히 가꿨습니다. 그랬더니 올해 사과농사가 아주 잘 되어 나무마다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감사하다며 사과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사과를 받은 것보다 그들이 깨달은 것이, 또 제 말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더욱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란 느낄 감, 감동할 감
(感), 사례 사(謝)입니다. 즉 내 마음으로 느끼고 감동할 때 상대에게 사례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언제 느끼고 감동하느냐? 바로 깨달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문둥병 열 명을 만나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중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찾아와 예수께 영광을 돌렸고, 나머지 아홉 명은 감사는커녕 인사 한마디 없이 돌아갔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라고 물으셨을까요. 사실 예수님이 고쳐주셨을 당시에 열 명의 문둥병자 모두는 고침을 받았는지 알지 못했고 가다가 고침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 명중 한 사람만이 깨달은 겁니다. 분명히 성경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눅17:1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가다가 “아~~ 그분의 은혜로 내가 이렇게 새 사람이 되었구나.” 깨닫고 돌아와 감사한 것입니다.
깨달아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사도 바울의 넘치는 감사를 볼 수 있습니다. 왜 그가 그렇게 감사할 수 있었느냐?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3),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훼방하고 핍박하고 죽이던 극악무도한 사람이었음을 부끄럽지만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고, 사도가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절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그래서 그는 매를 맞아도, 굶어도, 포승줄에 묶여도 감사했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목숨조차 귀히 여기지 않는 자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아름다운 열매가 되어 하나님의 단 앞에 올려지기를 무엇보다 소원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어디 사도 바울뿐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베드로는 어린 비자 앞에서 스승인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그가 채찍에 맞고 고문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 앞에서 세 번씩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대역 죄인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그는 그 죄에 눌려 살았습니다. 예전처럼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갔지만 의욕도 없이 그저 그물만 던져놓고 무의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고기를 구워 허기를 채워주신 후에 묻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동일하게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배신자인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7). 그런 그가 그 예수님께 감사하며 사례합니다. 어떻게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내 양을 치라’던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저도 동일합니다. 비천한 저를, 죄 많은 저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당신의 종으로 삼으사 세계에 복음을 전케 하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알기에 이 한 목숨 바쳐 주의 일에 힘쓰고, 절대 순종하며, 자원하여 그분의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깨달으면 감사하게 됩니다. 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키우셨는지, 나 하나 잘 되게 하려고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깨달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부모님께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례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어려운 중에도 공부 잘해서 번듯한 사람이 되어준 것이 가장 큰 감사라고, 그것으로 충분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자식이 잘 돼서 용돈 많이 주고, 해외여행 시켜주는 것도 감사하지만, 그것보다 자식이 좋은 열매가 되어준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부부가 가정을 이끄느라, 자녀를 키우느라 서로 얼마나 고생하는지 깨닫게 되면 서로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고, 목사가 성도들을 위해 얼마나 애끓어 기도하는지 알면, 성도가 얼마나 주의 종들을 사랑하는지 알면 서로 서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깨달은 자의 고백이고, 쌍방 공동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못 깨달으니까 불효하고, 서로 싸우고, 서로 불평하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기에, 사울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기에 배신자가 되고, 반역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성경은 말씀합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여러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나오미는 행복을 찾아 이방신의 땅인 모압으로 이주합니다. 그러나 행복 대신 거기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상심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 그는 깨닫습니다.
‘내가 살던 하나님의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리라.’ 그래서 그는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재벌인 보아스를 예비하셨고, 그를 통해 나오미의 가정을 회복케 하십니다. 깨닫는 것이 복이요, 깨닫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더욱 큰 복입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망하고, 고생하는 것을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억울해야 할 일이지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감사할 것은 내가 병든 것을 통해, 내가 가난한 것을 통해, 내가 망하고 고생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어서 감사한 것이고, 내가 깨달아 변화되면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아! 내가 병든 것은 귀신 때문이야.’라고 깨달으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성령충만하니 귀신을 쫓아 건강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깨닫는 것이 감사한 거죠. 그 감사는 말로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드림으로 완성되는데, 그것은 내게 주신 건강으로 그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깨달음의 크기와 감사의 크기는 정비례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 매일 감사하게 됩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눕히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부모님의 수고를 깨달을 때 감사하여 잘 섬기게 되고, 스승의 노고를 깨달을 때 스승을 존경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자의 헌신을 깨달을 때 목자의 말에 순종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여러분, 내게 감사가 없는 것은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감각이 없는 아홉 명의 문둥병자가 되지 말고, 깨닫고 감사하는 자가 됩시다. 그럼 감사가 넘치게 되고, 더 풍성한 감사를 낳게 될 것입니다. “주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할렐루야!
깨닫지 못하는 자는
개돼지나 다름없다
은혜를 알면
감사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