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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우리, 사명에 부도내지 말자(행20:23~24)

1120호 · 2021-1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이는 사명자인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명(使命)이란 부릴 사(使), 목숨 명(命)으로, 부리는 주군에게 목숨까지 내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곧 사명자는 주군에게 절대 복종, 절대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처럼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아무나 사명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왕이 암행어사를 지명할 때 아무나 택합니까? 하나님도 사명자가 되는 충족조건을 제시하셨고, 이에 맞는 자가 사명자가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부모, 형제, 심지어는 처자까지 뒤로 하고 주군을 따를 수 있는 각오가 있는 자입니다. 주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라고 말씀하셨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의 심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젖도 아직 떼지 못한 어린 송아지를 뒤로 하고, 번제물이 되는 줄 알면서도 스스로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의 심정이 될 때 비로소 사명자의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가 잠깐 가족과 인사를 나누겠다고 예수님께 고하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고 매몰차게 말씀하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씀에도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9:60)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주의 종 길을 가면서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 처자는 물론 친구까지 뒤로 했습니다. 어머니 환갑날에도 부흥회에 가야 했으니 장남으로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만 조금도 갈등하지 않음은 저는 이미 사명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명자라고 의무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에 따른 보상도 있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명을 완수하면, 사명을 잘 이행하면 사명을 위해 네가 버린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둘째, 사명자가 되려면 내 뜻을 접고 주군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힘든 형편이나 어려운 환경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내 지식, 내 뜻, 내 경험, 내 주관을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일만큼은 정말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버지 원대로’ 아버지 뜻을 따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를 지셨지만, 우리는 ‘아버지 원대로’ 사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게도냐 사람이 부르는 환상을 보고(행16:9) 아시아로 가려던 자신의 뜻을 접고 유럽을 복음화 했습니다. 저 역시 비행기만 봐도 멀미가 나지만, 그래도 종은 종일뿐, 종은 의지가 없기에 지구 반대편을 넘나들며 선교에 매진해왔습니다.

목사 임직을 할 때면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라며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합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고도 찬송합니다. 그런데 막상 척박한 곳으로 발령을 내면, 아니 서울만 조금만 벗어나도 ‘기도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목사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자는 이미 탈락입니다. 종 친 겁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지만 주님의 뜻이기에 그 길을 갔습니다. 제가 늘 ‘나는 예수의 노예’라고 말하는 것은 제 뜻과 생각을 일찌감치 기도원 가묘에 묻었기 때문입니다. 노예가 무슨 자기 주관과 뜻이 있습니까? 분부하신 대로 할 뿐입니다.

그렇게 사명을 감당한 자를 보고 하나님이 가만 계실까요? 아버지 원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권세를 넘기신 것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에게도 하늘과 복과 이 땅의 것을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제가 샘플입니다. 어딜 가나 제게 부족함이 없이 채우시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셋째, 사명자가 되려면 시작할 때 마음을 끝까지 가져야 합니다. 초지일관(初志一貫)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3:14)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환난과 핍박이 와도, 죽음 앞에서도, 돈이나 이성이나 권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신앙이 밑받침되어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소금은 불에 끓여 기체가 되어도, 물에 녹아도 액체가 되어도, 고체 덩어리로 있을 때도 짠맛을 잃지 않습니다.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진 자가 사명자의 자격이 있습니다.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히게 되지요(마5:13). 가룟 유다, 사울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시작할 때 마음이 끝까지 그대로 가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됩니다. 우리가 이 길을 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 아닙니까? 하늘나라를 상속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한 상에 앉아 떡을 떼며,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그날을 바라다보고 가는 것 아닙니까? 그날이 없다면 저는 진짜 이 길 안 갑니다.

만일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사명에 부도를 내면 어찌 될까요? 회사가 부도를 내면, 개인이 부도를 내면 옥에 갑니다. 감옥에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명에 부도를 내도 옥에 갑니다. 감옥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감옥은 기간이 차면 나옵니다만, 지옥은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못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에 오는 자들에게 ‘다시 생각해보라.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주의 종 길 아무나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목사, 전도사만 사명자일까요? 아닙니다. 장로, 권사, 집사, 성도 모두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마28:19~20)라는 명령을 부여받은 사명자들입니다. 다만 역할이 각자 다를 뿐입니다. 주일 새벽부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안내를 서는 안내위원들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야말로 사명자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십 수 년 간 성가대를 서는 분들, 허리가 굽었는데도 헌금위원을 하시는 권사님들, 어린 것을 소변까지 받아가며 애쓰는 주일학교 교사들…. 다 사명자입니다. 교회 안에 의사, 약사, 변호사…,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중에서 봉사(奉仕)가 제일입니다. 내가 낮아서 남을 섬기는 봉사자들이 사명자 중 사명자입니다.

우리, 사명에 부도내지 맙시다. 부도(不渡)란 아닐 부(不)에 건널 도(渡), 곧 건너서는 안 되는 다리입니다. 왜냐? 그 다리는 지옥으로 가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꿈에 제가 예수님과 함께 심판을 하는데, 우리 교회 장로를 건지려 애썼지만 결국 못 건졌다고 합디다. 그날은 행한 대로 심판을 받기에 그렇습니다. 사명에 부도낸 자에게 아량이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는 그 지점에서 의의 면류관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기까지 우리 함께 달려봅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할렐루야!

작업의식이냐

사명의식이냐

가치를 아는 자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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