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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호 목차 › 붕우칼럼

위로할 때가 아니다

1108호 · 2021-08-01

“나에게 맞을래? 예수님께 맞을래?”

나는 제자들이나 직분자들이 잘못했을 때 호되게 야단을 친다. 더러는 ‘너무 심한 거 아니냐?’라고 하지만, 고름이 살이 안 되는 법, 곪은 건 아파도 짜내야 한다.

의사는 위로자가 아니라 치료자다. 고통스럽더라도 썩은 것을 도려내고 잘라내서 환자를 살리는 것이 진정한 의사다. 그런데 의사가 어설프게 환자나 위로하고 있다면, 썩은 부분에 거즈나 덮어주고 있다면 어찌 될까?

나 역시 위로자가 아닌 치료자다. 나는 신설된 주일 4부 예배에서 설교할 때 발음이 불분명했던 목사를 지적하고 야단쳤다.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자가 발음이 부정확하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 아니겠나. 그런데 누군가는 그 목사에게 ‘괜찮다’, ‘나는 알아들었다’라고 위로했단다. 나는 그도 야단쳤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 목사를 죽이는 거라고 정확히 짚어줬다.

아픈 부분을 꾹 눌러 짜내는 것을 보면 매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인간미가 없어 보일 수 있다. 나도 3자라면 그럴 수 있다. 굳이 인심 잃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나 내가 기른 내 제자가, 해산의 수고로 낳은 내 자식 같은 성도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썩고 있는데 가만 보고만 있다면 나는 스승도, 아비도 아니다.

충고나 훈계는 듣는 사람만큼 하는 사람도 힘들고 어렵다. 뻔히 상대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계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 제자니까, 내 성도니까.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을까.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히브리서 12장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목회 초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설교하는 나에게 ‘목사님, 깡패요? 왜 깡패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설교를 하세요?’라고 따끔하게 충고해주었던 박용선 장로님처럼 잘못된 것은 지적해줘야 한다. 그 후로 나는 주머니를 꿰매버렸다.

지구를 떠나야 지구가 보이는 법. 나 아닌 3자가 나를 제대로 본다. 그러므로 남의 훈계나 충언이 아프더라도 귀 기울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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