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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기도로 살아왔다(시107:10~16)

1103호 · 2021-06-27

당신은 이렇게 기도해봤습니까? 당신은 엘리야처럼 가랑이 사이로 머리가 들어가도록 간절하게 기도를 해봤습니까(왕상18:42)? 하갈처럼 방성대곡하며 기도해봤습니까(창21:16)?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기도해봤습니까? 히스기야처럼 학처럼 비둘기처럼 사무치게 울면서 기도해봤습니까(사38:14)? 다윗처럼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며 침상을 적시는 기도를 해봤습니까(시6:6)? 더욱이 예수님처럼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질 능력을 달라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해봤습니까(히5:7)?

이렇게 기도했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엘리야는 3년 6개월 닫혔던 하늘을 열었고, 하갈은 눈이 밝아져 옆에 펑펑 솟는 샘물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아들인 이스마엘의 장래를 약속받았습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을 감동시켜 풍전등화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내고 부림절을 맞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어찌 되었나요? 그의 통곡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해주셨습니다. 다윗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가 되었으며,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능히 지고 죽으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감동하사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해봤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이렇게 기도했기에 물 없는 사막, 눈 덮인 산야를 걸으면서도 37년을 건재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일생은 기도의 일생이었습니다. 철산리에서 1명을 놓고 목회를 시작하면서 저는 단에서 학잠을 자며 일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낙타무릎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대형교회의 일꾼들이 대거 우리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부흥이 되자 여기저기서 이단이다 잘못됐다 했습니다. 그때도 눈물 뿌려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제 잔이 넘치게 하셨으며, 해외로 제 발걸음을 인도하여주셨습니다.

안수한 교단에서 제명되었을 때, 올림픽공원에서 국가적인 행사로 인해 예배처소가 없을 때, 교회가 분열될 위험에 처했을 때, 온갖 매스컴들이 저를 비하하고 저를 핍박할 때, 가족들이 다 떠났을 때, 기도원이 재판에서 패소했을 때, 사지가 마비되고 눈이 실명 위험에 처했을 때, 간이 90% 굳었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도 저는 누구와 의논하지도,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간절히, 방성대곡하며 기도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제 눈물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언젠가 해외선교팀원인 한은택 목사가 교회 신문 칼럼난에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집회에 나가보면 목사님은 일찍 주무시지도 않지만, 주무시기 전에도 기도요, 새벽같이 이른 시간에도 그 기도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저녁 집회를 앞두고도 또 기도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다. 집회 때마다 항상 성령의 역사하심은 기도의 힘임을 알 수 있다. 목사님 방에 들어가 보면 마치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방처럼 깨끗하다. 침대 시트조차 걷지 않고 주무시는지 침대와 침대 밑에 깔린 겹쳐진 타월에 선명하게 찍힌 두 무릎 자국이 보일 뿐이다. 목사님의 오늘은 바로 거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입니다. 저는 집회를 앞두고는 하루 7시간 이상 기도합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역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의 야외집회이기 때문에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비가 오거나 태풍이 불어올 때면 밤이 새도록, 집회 나가기 전까지 그야말로 목이 터져라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몽골 메인스타디움 집회 때의 일입니다. 집회를 앞두고 평온하던 울란바토르의 날씨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먹구름이 하늘을 덮기 시작하더니 거센 돌풍이 일어나 사정없이 이곳저곳을 헤집고 돌아다녔습니다. 저는 호텔에서 무릎을 꿇고 엘리야처럼 가랑이 사이로 머리가 들어갈 정도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집회 시간이 다 되어 메인스타디움을 향해 갈 때까지도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집회 장소에 도착할 때쯤에 돌풍이 잦아들기 시작했고, 시커멓던 하늘이 뚫려 파아란 하늘을 드러내며 일곱 색깔 무지개가 드높게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은 영상을 통해 다 보셨을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최대 교회를 이끌고 있는 카니발 목사가 개최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집회 첫날, 커다란 체육관에는 단지 몇 백 명만 바닥에 앉아있었습니다. 장장 사흘에 걸쳐 지구 반대편까지 갔건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첫날 집회를 마치고 통역관인 이현숙 선교사는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위로하며 함께 부르짖어 밤이 맞도록 기도했습니다. 사람을 보내달라고요.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다음 날 그 체육관이 꽉 찰 정도로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65절,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는 말씀이 이뤄진 것입니다.

라트비아 리가 집회, 멕시코 메리다 집회, 가나 오부아시 집회, 인도 뉴델리 집회…. 이 모두 기도로 일군 작품들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일하셨기에 가능한 집회였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였습니다. 기도하니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셔서 바다가 벽을 이루게 하셨고, 기도하니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으며, 기도하니 하나님이 메추라기 떼가 날아들게 하셨고, 기도하니 쓴물이 단물이 되게 하셨으며, 기도하니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지키셨고, 기도하니 반석에서 물이 솟게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능력으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를 때 옷에 물 한 방울 묻혔습니까? 아니요, 오직 기도하니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엘리야처럼 기도하면 3년 6개월 닫힌 하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막혔던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겁니다. 당신이 한나처럼 기도하면 하나님이 닫으셨을지라도 마음을 돌이키사 소원하는 것을 주시고, 당신이 히스기야처럼 기도하면 의사가 손을 뗀 병일지라도 나음을 입을 것이고, 당신이 다윗처럼 기도하면 죽을죄라도 용서받게 됩니다. 왜냐? 하나님은 분명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했고,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했으며,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기도의 부족은 모든 것의 부족이다!”, “기도가 끝난 자에게 기대할 것은 없다!”고 늘 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현존하는 모든 문제의 열쇠입니다. 만능키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도는 만능키라고 정보를 주셨는데 여전히 문을 못 연다면 그건 당신 책임입니다. 요즘 우리 교인들의 기도 양이 많이 줄어든 듯합니다. 행여 우리 성도들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기름이 떨어져 가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될까 걱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입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107:10~11). 우리가 망하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가난한 것은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뜻은 방백을 의지하지 말고 우리가 모든 일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하나님)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107:19~20), 기도하면 고통과 저주에서, 병과 가난에서 해방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기도하기 싫은 자의 변명입니다. 기도하면, 부르짖어 기도하면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지 못한 비밀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니까요. 기도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할렐루야!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하는 자에게

불가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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