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땅한 의무, 찬양이다(시150:1~6)
모든 것은 목적이 있어 만듭니다. 의자는 사람을 앉게 하려고 만들고, 자동차는 운반수단으로 만들어집니다. 비행기는 하늘을 날라고 만들고, 핸드폰은 상호 연락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자기의 목적을 행치 않는다면 어찌 될까요? 당연히 그것들은 무익한 것이 되고, 조기 폐기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이유입니다. 에베소서에도 이를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
이는 찬양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시33:1). 우리 삶을 통해 그 분을 찬양하고, 우리의 입술로 늘 찬양을 해야 옳습니다.
찬송에는 놀라운 위력이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이야기부터 할까요?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 악신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수금을 잘 타는 다윗을 불러 사울 왕 앞에서 수금을 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악신이 물러갔습니다(삼상16:23). 그렇습니다. 찬양을 하면 악한 것들이 다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영적인 힘과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에돔 왕과 함께 모압과의 전쟁을 준비할 때 군사들이 목이 말라 기진맥진하자 선지자 엘리사에게 문제 해결을 호소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먼저 해답을 제시하는 대신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게 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이 시작되자 하나님의 감동이 엘리사 위에 머물렀고, 개천을 파내어 물을 공급해주는 기적이 일어나고, 모압을 그들 손에 붙여주신다고 약속을 받게 됩니다(왕하3:15~18). 찬양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왜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22:3)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대하 20장에 모압과 암몬이 연합하여 침공할 때에 여호사밧이 두려워하니 하나님께서 레위사람 야하시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싸우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미 찬송의 능력을 맛본 여호사밧은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했고, 전쟁의 선두에 병사가 아닌 노래하는 자들을 세워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연주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복병을 두어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셨습니다.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 살육하는 자중지란
(自中之亂)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대하20:21~23).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원수가 있을 때, 악한 마귀가 나를 괴롭힐 때 찬양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도 찬양의 능력의 좋은 예가 나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입니다. 바울은 귀신이 들려 점을 하는 여인이 있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빌미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 안에서 매를 맞고 손발이 묶인 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밤중에 일어나서 기도하며 찬양을 합니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6). 옥문이 열리고 그들을 묶었던 사슬이 저절로 풀린 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니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주의 일을 하다 잡혀 많이 맞고, 옥에 갇혔으니 불평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불평 대신 찬양을 했습니다. 우리도 불평하는 입 대신 찬양의 입을 열면,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우리를 묶은 많은 문제와 어려움, 저주의 사슬이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찬양하는 자에게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찌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찌어다 저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너의 가운데 자녀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 추위를 감당하리요 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시147:12~18).
그 축복을 받은 자가 바로 다윗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노래 잘하는’다윗을 택하셨습니다
(삼하23:1). 다윗은 여호와의 궤가 들어올 때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였고(삼하6:5), 다윗성에 입성할 때는 바지가 흘러내려도 모를 정도로 춤을 추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삼하6:20). 그런 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이것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성가대의 기원도 다윗에서 비롯된 겁니다. 역대상 25장에 보면 다윗이 어마어마한 성가대를 구성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시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찬양은 사막에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사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찬양 대신 불평을 합니다. 교회에 와서 손뼉 치며 찬양을 할라치면 남의 눈치를 봅니다. “내가 이래봬도 많이 배운 사람인데….”, “사회적 체면이 있지.” 합니다. 하지만 왕인 다윗도 바지가 흘러내린 것도 모를 정도로 찬양을 했는데, 우리가 왜 못합니까? 우리는 왜 안합니까?
우리 아들들이 어릴 때, 제가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하면서 춤을 추니까 어린 마음에 좀 창피했나 봅니다. “아빠, 제발 춤 좀 추지 마세요. 창피해 죽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다윗이 미갈에게 했던 것처럼 말했습니다. “아빠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한 거야. 사람 보라고 한 게 아니란다.” 찬양은 우리 기분에 취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 보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그분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찬양을 해야 할까요? 다윗은 시편 150편을 통해 말합니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찌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찌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찌어다”
(시150:3~5). 시편 33편에도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찌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시33:2~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춤을 추며 찬양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마귀란 놈이 가로채서 세상 사람들은 악기를 동원하고 흥에 겨워 노래하고 즐깁니다. 정작 하나님의 자녀들은 ‘안 해요.’, ‘못해요.’ 이러고 있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기도와 찬양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은 남편과 아내 같은 것입니다. 하나가 될 때 기쁨과 축복의 자녀를 낳게 됩니다.
하나님은 찬양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황소를 예물로 드리는 것보다 찬양이 더 좋다고 하셨습니다(시69:30~31). 그러므로 호흡이 있는 동안 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시150:6). 그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할렐루야!
찬양은
사막의 오아시스다
찬양은
가뭄에 단비와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