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상처
오래전 양배추를 다듬다가 칼에 손가락을 베었다. 한참 지압을 한 후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하지만 벤 자리에 물이 들어가자 다시 틈이 벌어지고 하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상처가 덧났다. 한 이틀 꽉 달라붙는 밴드를 계속 붙인 후에야 벌어진 상처가 메워지고 붓기가 가라앉았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았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상처의 깊이는 마음이 언짢은 정도부터 트라우마라고 표현하는 매우 충격적인 경험까지 다양하다. 사람에게 받는 상처 중에는 아마도 가까이 있는 가족으로부터 받는 상처가 가장 깊을 것 같다. 가족은 가장 사랑하고 믿는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믿었던 친구나 주변의 사람에게 받는 상처도 마음에 오래 가는 흉터를 남긴다. 상처받는 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상처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상처가 남기는 정신적, 영적 흉터에 차이가 있다.
첫 번째로 마음속 깊이까지 찔린 상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다 아물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경우다. 찔린 자리가 아물지 않아서 덧나고 부었는데도 스스로 괜찮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모든 생명체에는 자연적인 치유의 힘이 있다. 그러나 상처를 인식하지 않은 채 덮어놓으면 치유될 수 없다. 때론 주위의 모든 사람은 그 사람의 상처를 보지만 본인은 그 상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받은 상처 때문에 예민한 반응을 하고,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어렵고, 심지어는 고슴도치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찌르면서 살기도 한다.
두 번째는 상처를 직시하고 알맞은 조치로 회복의 길을 가는 것이다. 회복은 용서에서 시작한다. 회복의 길을 가려면 상처를 준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용서는 쉽지 않아서 한 번씩 우리의 기억 속에 아픔으로 찾아오지만, 상처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평생 흉터를 안고 살지 않으려면 벤 손가락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듯이 하나님 앞에 그 상처를 내어놓고 하나님의 싸매심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은 상처받은 심령들을 멸시하지 않으시고 눈물에 젖어있는 그의 자녀들을 오직 그분의 은혜로 회복시키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정금 전도사
때문에와 덕분에
코로나 초기, 이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며, 어떠한 영향도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잡혀있던 행사나 모임들이 취소가 되거나 연기되면서 행사관련 촬영이나 편집 일을 하던 나에게도 타격이 왔다.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어찌할 줄 몰랐고, 코로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럴 때마다 총회장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셨던 ‘때문에 신앙’과 ‘덕분에 신앙’을 생각하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방송에 대한 흐름과 모든 행사들이 비대면으로 바뀌면서 온라인 스트리밍 장비와 기술들이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는데, 외부 비대면 행사들을 진행하게 되면서 다양한 스트리밍 프로그램 및 장비들을 접하게 되었다.
또한, 중고등부에서 온라인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통해 스트리밍을 준비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새로운 장비들에 대한 정보들과 기술들을 습득하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시작된 온라인 새벽기도회,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익히고, 활용할 수 있도록 공부하는 시간, 또한 건강을 생각하게 되면서 이번 코로나 기간이 나의 영·혼·육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이러한 감사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때문에’라는 불평에서
‘덕분에’라는 감사로 바뀌게 되었다.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살 때 우리 상황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늘 그래서, 그래도, 그러나, 그러므로, 그렇지만,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살자.
이은성
es2563@naver.com
새로운 삶
새로운 환경에서 사는 삶, 활력이 넘치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까지가 그런 시기이다. 그러나 나이 들면 모든 변화가 극도로 적어지며 활력을 잃게 된다. 그게 늙는 것이다. 나는 62세에 늦깎이 목사가 되었다. 익숙했던 환경이 다 사라지고 새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발령을 받아 다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변화에는 항상 고통과 불편함이 따르지만, 이젠 새 삶을 살게 된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매일 저녁 기도가 끝나면 텅 빈 교회에 홀로 남으니 적적하다. 눈을 돌리니 내게 삼천 평 정원과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가 생겼다. 인근 지바 신사에 가면 정원이 참 잘 꾸며져 있다. 저녁 늦은 시간에 가면 혼자 그 정원을 누릴 수 있다. 외로운 것만 제외하면 참 고즈넉한 삶이다. 어느 날 매력적인 고양이가 내 곁에 왔다. 한국에서는 영물이라는 생각에 가까이 안 했는데 왠지 반갑다. 고양이가 좋아할 간식을 이것저것 주는데 입맛에 안 맞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진다. 입맛이 맞으면 좀 떨어진 곳에서 털 손질을 하며 잠깐 같이 있다가 쌩하니 사라진다. 건드려 볼 수 있는 곁을 안 준다. 요새 주는 간식에 반응이 시큰둥하다. 배고프면 먹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참 도도하다. 밀당을 해봐도 이길 수가 없다. 고기구이를 줘보니 환장을 하고 반색한다. 내 마음이 얼마나 흐뭇한지. 딸들을 이리 길렀다면 아빠를 더 사랑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있다. 사업한다는 핑계로 자주 사랑을 주지 못했다. 아쉬움이 많은 내 생을 이제는 잊으려 한다. 이제 주어진 새로운 삶에 후회가 없도록 내 힘을 쏟으련다.
내가 고양이에게도 좋은 것을 주려고 애를 쓰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시랴. 고난 오면 불평하고 휭 떠나버리고, 배고프면 사랑 없이 돌아와 서성이는 모습이 우리와 많이 닮았다. 가까이 오기를 바라는 심정이 문 열어주기를 기다리시는 주님과 같다. 내 모든 삶이 훈련이고 감사이다. 삼천 평 정원을 곁에 두고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인 것을.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시100:4).
이광주 목사
leekjlkj@naver.com
보이지 않아도
아기는 9개월이 되면 대상 영속성이 발달하게 된다고 합니다. 대상 영속성은 눈앞에 있던 사물이 없어져 보이지 않더라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컨대 엄마가 아기 앞에 있다가 어떤 사물 뒤에 숨더라도 엄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그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모태신앙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하나님께서 응답이 없을 때마다 ‘하나님은 안 계시나? 왜 아무런 응답이 없을까?’ 투정을 부리고,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이 매번 의심의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승리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나약한지라 긴 연단의 시간을 견디다 보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불안감이 엄습해오고, 하나님이 계시긴 한 걸까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 가족은 집안의 큰 사업을 두고 작년 초부터 합심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루에 네 번, 어머니는 하루에 세 번, 우리 형제들은 매일 아침마다 기도를 했고, 회사 업무가 조금 일찍 끝나 시간이 허락되면 저녁기도에 동참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기도를 한 것은 처음인데 사업은 점점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모든 생활을 기도 중심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11월 임신 초기였는데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삭이 되어도 기도의 불은 더 타올랐습니다.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땀을 뻘뻘 흘리며 더 크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보이는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출산이 임박하자 한 꿈을 꾸었는데, 저와 첫째 동생이 만삭이 되어 한날한시에 아기를 낳으러 가는 꿈이었습니다. 어머니께 꿈 얘기를 들려드렸더니 이것은 필시 사업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꿈이라며 다들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출산을 하고도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났는데도 아무런 일도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출산한지 한 달도 채 안되어, 갓난아기를 끌어안고 매일 아침, 저녁, 부모님 사무실로 기도하러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은 금식까지 두어 차례 하시면서 애통하며 애끊는 기도를 하셨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사업의 계약이 해지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기도의 그릇을 채우기 위해 산후조리를 충분히 해야 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기도하러 갔고, 이 코로나 시국에 연약한 신생아까지 동원했는데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조용하신 걸까? 정말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 걸까? 왜 보여주시지 않을까? 마음에 의심의 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여섯 항아리를 가득 채우기엔 아직도 우리의 기도가 부족한 것인지 까마득했습니다. 그러던 중 또 꿈을 꾸게 되었는데, 부모님 댁에 거실이며, 주방이며, 방방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자들이 그 사업을 놓고 기도하는 꿈이었습니다. 우리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업을 위해 기도하고 있고, 함께 기도의 독을 채우고 있다는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은 하나님께서 무조건 내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호언장담하다가, 또 어떤 날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며 깊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에게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마가복음 11:24).
우리 가족의 기도는 역전하는 그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며, 두 번 다시 의심하지 않고 굳건한 믿음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조금 더디다고, 응답의 말씀이 없다고,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장 귀하고 좋은 것으로 예비하고 계십니다. 연단 후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1,6).
김온유 집사
ceo@edenique.co.kr
폐경기 호르몬 치료와 심혈관질환
폐경은 여성의 월경이 이제 영원히 없어진다는 뜻이고, 이는 여성임을 의미하는 난소의 기능이 다 끝나버렸다는 중대 사안에 해당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1812년 처음으로 프랑스 의사가 폐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후 100년이 더 지난 1920년에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의 구조를 알아냈고, 1942년에 드디어 미국 식약청에서는 프레마린이라는 에스트로겐 복합제를 폐경 증상의 치료에 사용하도록 허가했다. 폐경이 된 여성이 여성호르몬을 복용하여 폐경으로 인한 증상을 해결하면서 프레마린은 모두가 인정하는 만병통치약처럼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급성장하던 호르몬 치료약계 회사는 호르몬 치료를 심장질환의 예방약으로 미국 식약청에 허가 신청을 할 정도였으며 호르몬 치료효과의 입증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1991년 미국 국립보건원의 관리 하에 계획하여 40여개의 의료기관에서 1993~1998년에 걸쳐 모집된 50~79세 사이의 폐경 여성 161,809명이 참여한 대규모의 연구는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틴의 병합요법 연구를 시작한 지 5년여 만인 2002년에 기대와 달리 심장질환, 유방암, 뇌졸중, 정맥혈전증의 위험성이 증가하여 골절 감소와 대장암 위험 감소의 이점보다 상회하였으므로 연구가 중단되었고, 이 결과가 발표된 이후 폐경 호르몬 치료는 혼란에 빠져버렸으며 처방이 급격하게 감소하게 된다. 과연 폐경 여성에게 호르몬 치료는 좋을까? 나쁠까?
폐경은 안면홍조, 발한, 불면증, 전신통, 불안감, 우울, 기억력 감퇴, 비뇨생식기 위축, 성교통, 피부 변화가 전형적인 증상이다. 폐경이 된 여성의 15~25%는 그 증상이 매우 심하다. 따라서 이들은 호르몬 치료를 시작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며 적절한 검사를 통해 호르몬 치료의 장단점을 평가하여 안전한 호르몬 투여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다.
여성건강연구에서는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틴을 병합 투여한 첫 1~2년에 심장질환의 위험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므로 나이가 많고 폐경이 된 지 오래된 여성, 특히 심장질환을 앓았거나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는 폐경 호르몬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Dr. 조희경 집사
pearl9230@naver.com
소원과 소망 & 욕심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를 끊임없이 원하고 바라고 요구하며 살아간다. 그것들은 살아가는데 필요하고, 또 그것들로 인해 점차 성장해나간다. 그러나 때론 과한 욕심이 자신을 해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려하실 때 우리 마음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2:13).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과 소망, 비전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의 사명을 이루는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까지 그 소원이 점점 더 강하게 해주시어 그분의 길을 따라가게 하시고, 나의 마음과 생각을, 또 상황들을 인도해주신다. 지금 현재 내 눈앞에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시고, 결국엔 보게 하시고, 가게 하시고, 이루게 하신다. 
한편, 우리 마음속에 개인적으로 생겨나는 소망들이 있다. 보통 더 좋은 옷,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집을 소망하고, 육체의 건강과 더 나은 사회적 위치나 직업, 마음의 행복을 소망한다. 이러한 소망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과 달리 나의 자발적인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보려 하지 않으면 볼 수 없고, 가려 하지 않으면 갈 수 없고, 이루려 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의 큰 뜻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들어놓으신 세상의 법칙을 깨지 않으신다. 바로 심은 대로 걷는다는 법칙이다. 합격을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고, 더 나은 형편을 위해선 저축과 재테크도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 없이 하나님의 기적만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무책임에 가깝다. 다만, 그러한 것들에 지나치게 사로잡히게 되면 욕심이 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 나의 개인적인 소망, 그리고 조심스러운 욕심 사이 현재 나는 어디에 서 있을까?
박찬영 집사
post.naver.com/imsofriendly
